2012년 5월 7일 월요일

한국에서 온 첫 손님

1.

지난 주말 한국에서 온 첫 손님을 맞았다. 한림대 국제대학원에서 북유럽 복지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김순영 박사와 지난 해 이화여대에서 스웨덴 복지국가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 중인 장선화 박사가 그 주인공. 두 분은 북유럽 국가들의 현지 연구를 위해 스웨덴, 덴마크 등을 둘러보는 일정에 주말을 이용해 핀란드를 잠시 다녀갔다.
 
재미난 것은 이 블로그에 내가 쓴 올해 핀란드 대선 분석 글을 장선화 박사가 우연히 보고 연락해온 일이다. 정작 한국에서는 일면식도 없던 분들을 여기 손님으로 맞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장선화 박사는 지난 해 내가 강사로 활동한 경희대 시민교육 객원교수이신 김윤철 선생님의 부인이라니,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하다.
 
2. 

스톡홀름에서 배편으로 헬싱키를 와서 다시 기차로 땀페레까지 도착한 두 분을 위해 땀페레 시내와 호수 주변을 안내한 뒤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관심 분야와 방향이 비슷하게 겹치는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기울이니 금세 시간이 흘러갔다

스웨덴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과 최근의 도전들, 이들 나라의 합의적 의사결정 구조와 적극적 민주주의, 스웨덴 사민당의 올로프 팔메 등 정치 지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 핀란드 교육제도의 특징과 성공 비결, 핀란드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이민자 문제, 최근 한국의 복지국가 담론과 연구 동향 등을 놓고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갔다.

마치 오래된 벗들이 찾아온 것인 양 기쁘고 반가웠다. 손님들이 오자 선재는 신이 났고, 아내도 즐겁게 식탁의 대화에 함께했다. 11시가 넘도록 먼 하늘에 푸른 빛이 감도는 이곳 풍경을 두 분은 신기해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오전에는 땀페레 시립 도서관에 있는 무민 박물관을 찾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장선화 박사는 이미 <무민 이야기>의 팬이었다. 토베 얀손의 독특한 삽화들과 무민 동화의 인상적인 장면들, 그리고 착하고 인정 많은 무민네 가족과 자유로운 방랑자 스너프킨, 철학자 사향뒤쥐, 식물 채집가 헤물렌 아저씨와 심술궂은 꼬마 미, 잃어버린 마법 모자의 행방을 찾아 달나라까지 다녀오는 마법사와 표범 등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충실하게 재현해놓은 박물관 내부를 함께 둘러봤다

시청 광장 주변과 남쪽 호수 주변을 산책한 뒤 함께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월요일부터 다시 강의를 해야 하는 장선화 박사가 먼저 헬싱키 공항으로 떠났다.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하는 김순영 박사는 그냥 그날 저녁을 우리 집에서 더 머물기로 해 시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집으로 모셔왔다. 핀란드의 다양한 맥주들, 특히 블루베리와 클랜베리를 넣어 만든 맥주들을 함께 마시며 저녁 나절 대화를 이어갔다. 베리 맥주들은 나도 처음 맛보았는데 맛과 향이 괜찮았고, 과연 온갖 종류의 베리 음식들로 풍요로운 핀란드의 특산물이라 할 만 했다  

3.  

마침 프랑드 대통령 선거의 결선 투표 결과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사회당 후보 홀란드(Hollande)가 현 대통령이던 사르코지를 근소한 차이로 눌렀고, 이는 17년만의 사회당 재집권이었다. 재정 위기에 처한 유럽의 미래와 프랑스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더불어 유럽연합의 보수적 동맹 축(Sarkozy-Merkel Axis)을 이끌어온 사르코지가 몰락함으로써 이른바 '메르코지' 협약이 표방해온 긴축과 예산 삭감을 통한 재정건전성 회복이라는 유럽연합의 재정 정책 기조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됐다. 홀란드는 유럽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 긴축이 아니라 적극적 공공 재정의 투자를 통한 성장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유럽중앙은행 ECB의 주요 임무로 물가 안정만이 아니라 성장이 명시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당선되면 EU 재정 협약을 재협상하겠다고 공약해왔다.
 
프랑스는 20121월 국제신용평가회사 스탠다드앤푸어스(Standard & Poor’s)로부터 국가신용등급이 AAA에서 AA로 강등된 바 있고, 현재 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이, 사르코지는 재임 기간 동안 독재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과 언론에 대한 통제 등으로 인해 2010<이코노미스트>지가 프랑스를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에서 "결함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강등하는 등 프랑스 민주주의의 후퇴를 불러온 것으로 평가받는다.(Hellen Drake, France,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50, 2011, p.970-979)
 
그는 또, 이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화주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구함으로써 인종적 차별주의 정책을 시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정책적 실패로 인해 사회당의 재집권이 가능한 공간이 열렸지만, 동시에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이끄는 극우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입지가 더욱 커진 것도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앞으로 홀란드의 사회당 정부가 프랑스와 유럽의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실업과 빈곤, 이민 문제 등에 대한 효과적 사회통합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마린 르 펜의 호언대로 프랑스 정치 지형은 다시 우경화되면서 위태로와질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유럽 정치의 변화를 예고하는 현장을 TV로나마 지켜보면서 대화하던 우리는,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사민당의 성장 과정에서 보이듯,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화적 자유에 대한 기본적 신념과 헌신 없이 현대의 진보 정치가 설 자리는 있을 수 없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의 무기력한 패배에 이어 이토록 구태의연한 진보 정당의 자화상이라니, 멀리서도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가 참 어렵다.

4.   

함께 토론하고 모색할 것이 많았지만 이제 김순영 박사도 심야 고속버스로 헬싱키 공항까지 가야했다. 훗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새벽 2시를 넘어 3시를 향해가는 땀페레 시내를 함께 걸었다. 인적이 끊긴 거리를 조용했고, 잠시 들른 땀페레 대학 도서관의 24시간 독서실만 환하게 불켜져 있었다. 여러 갈래의 선로가 멀리 흘러가는 한밤의 기차역 풍광을 내려다보았고, 건축 양식이 독특한 러시아정교회의 붉은 색 교회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터미널에 도착해 잠시 기다린 뒤 김순영 박사는 310분 버스를 타고 떠났다. 무사히 좋은 여행 하시기를 빌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인연으로 이역만리까지 뜻이 통하는 분들이 찾아온다. 짧은 만남에도 깊은 우정을 쌓은 것만 같다. 멀리서 오신 두 벗님들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하며, 여기 우리 가족의 첫 한국 손님 맞이를 기록해둔다.


 * 한국에서 오신 장선화, 김순영 선생님과 함께



*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사회당 홀란드 후보와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환호하는 파리 시민들(France24 뉴스 화면)

* 새벽 3시 땀페레 기차역의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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