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일요일

핀란드의 부활절 스케치

핀란드는 루터리안 기독교(Evangelical Lutheran Church)를 믿는 사람이 85%나 되는 나라여서 대부분의 국경일이 기독교에 관한 것이다. 그 중 부활절(Easter)은 크리스마스 이상으로 중요한 국경일인데, 4월 첫째 주 금요일부터 둘째 주 월요일까지 짧은 휴가에 들어간다. 이번에 우리 가족도 선재 유치원의 다른 핀란드 학부모에게서 초대를 받아 이 곳 부활절 문화를 체험해보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연휴 첫 날 이 아이네 집에서 열린 달걀 찾기 행사(Egg Hunt)에도 참석하고, 둘째날 저녁 호숫가 비치에서 열린 불꽃놀이와 지역 교회의 자정 미사에도 참석해 보았다. 참 소박하지만 유쾌하고 경건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속한 교회와 지역 공동체의 사람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초승달이 뜬 호숫가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어놓고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흥겹게 춤을 추며 노는 모습이 정말 정겨웠다. 마치 우리네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놀이와도 같은 모습인데,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어서 놀랐다. 아마도 핀란드의 원주민인 사미족의 문화가 남아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은데, 바이킹 복장과 수염을 하고 자기 조상이 바이킹 출신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참석한 젊은 이들은 대개 자유분방한 생태 페미니스트들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 노마디즘(nomadism)과 시간 탐험에 관심이 많고 녹색당에도 관여한다는 영국 출신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불꽃놀이를 마친 사람들은 등불을 들고 마을 길을 행진한 뒤 교회로 들어갔다.
삐스빨란 끼르코(Pispalan Kirkko)라는 이름의 교회를 들어서니 10대 청소년들이 합창과 연주를 하는데, 모던 록 풍의 선율에 핀란드어의 음악적인 목소리가 독특한 화음을 자아냈다. 교회는 깨끗하고 심플한 현대적 건축 양식의 건물인데, 핀란드 건축의 독특한 선과 면 분할이 느껴지는 전면부에 성화 세 점이 담긴 병풍이 하나 있고, 그 오른쪽 벽면 가운데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조명을 받고 있었다. , 이 소박함! 그리고 영웅적인 비장미를 최소화한 평범한 일상성의 미학, 그러나 그 속에 경건함이 살아있다.
등불을 들고 들어온 사람들이 옆으로 서자 그 가운데에서 한 젊은 청년이 불꽃 막대 두 개를 돌리면서 마치 마술사와 같은 의식을 진행했다. 불꽃은 그의 온 몸을 빙글빙글 돌면서 원을 그렸고, 그의 입 속에서 꺼졌다가 다시 옮겨 붙었다가, 팔등으로 옮겨 갔다가 손바닥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꺼졌다가 살아났다가, 마지막으로 제단의 촛불에 점화된 뒤 소멸했다. 불꽃으로, 성령(Holy Spirit)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인자(the Son of Man) 예수의 삶과 부활을 상징하는 의식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정말 현대의 주술사처럼 멋이 있었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리고 이어진 심야의 미사. 그런데 교회의 젊은 사제는 부활절 설교를 마치 한 세련된 대학 강사의 프리젠테이션처럼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활절의 의미와 예수의 삶의 메시지를 윽박지르듯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태도를 갖고 깊이 대화하고 생각할 것을 권하면서, ‘지금, 여기의 내 삶 속에서 예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설교 중간에는 영화 <반지의 제왕> 동영상의 일부(주인공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용암 속에 던지려다 끝내 그 유혹의 힘(반지의 목소리)에 굴복해 돌아서며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장면)를 프로젝터로 보여주면서 지상의 권력을 향한 인간 욕망의 강력함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합창과 성찬식. 그렇게 미사는 끝이 났고, 사람들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그곳에서 다시 밤새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논다고 했다. 나는 간단히 차와 빵을 먹은 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간과 자연이 만나고, 종교와 예술과 건축이 만나는 곳. 세대와 세대가 만나고, 합리적 사고와 경건한 신앙이 만나는 때. 그 속에 예수가 부활하고 있는 듯 했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의 날이 시작되길 나는 기도했다.




 땀페레 사람들의 부활절 Egg Hunt 행사와 불놀이 

이 즈음의 소식

1.     풍경

새벽에 잠이 깨어 쓴다. 벌써 북구의 여름철 풍경을 실감하게 만드는 날씨다. 10시가 넘도록 청초한 하늘 빛이 남아 있고, 새벽 4시 반에 벌써 푸른 동이 튼다. 금요일이 되자 사람들은 오후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카페와 펍, 호숫가 벤치와 천변의 잔디밭까지 점령하고 커피와 맥주를 마시며 계절의 변화를 즐기고 있다. 5월과 6, 땀페레 시내 곳곳에는 다양한 축제와 행사들이 열린다고 하는데 나도 제법 기대가 부푼다. 학교들도 이제 일 년간의 학사 일정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시험이 끝난 학부생들은 런던으로, 뮌헨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여행 계획들을 서두르는 모양이다. 우리 가족도 올 여름에 가까운 헬싱키, 투르쿠, 스톡홀름 등지를 다녀올 생각이다.

2.     장학금
땀페레 대학교의 장학금 심사 결과 발표가 났다. 다행히 8개월간의 장학금 대상자로 선정됐다. 학과에서는 1순위로 올렸다기에 내심 1년 간의 풀 장학금을 기대했는데, 최근 핀란드도 재정이 넉넉치 않은 상황이라더니 그 여파를 느끼게 한다. 발표를 보니 정치학과가 속한 매니지먼트 대학원에서는 9개월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1명 있고, 나머지 10명 남짓 학생들이 8개월, 6개월, 4개월 장학금 자격을 받게 됐다. 부족한 재원을 가급적 고루 나누는 방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진 듯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인데, 그렇다고 풍족한 것은 아니어서 아내와 긴축 재정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지도교수와 협의해 핀란드 학술재단에서 제공하는 4년짜리 연구 장학금에도 적극 지원할 생각이고, 주당 25시간의 노동 비자가 있으니 긴 여름 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도 시도해볼 참이다. 아카넷 출판사와 진행하고 있는 유네스코 인권 서적의 번역 작업도 박차를 가해야겠다.


3.     논문과 연구
지난 3월과 4월의 근황을 잠깐 보고한다. 3 12일 학과 세미나에서 박사논문 연구계획을 발표했고, 무사히 마쳤다. 다양한 각도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비판이 이어졌지만 분위기나 태도는 결코 공격적이거나 차별적이지 않았고, 연구계획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둔 우호적 조언들이었다. 문제를 비껴가지 않지만 그 바탕에는 인격적 존중이 깔려있는 것을 느꼈다. 지도교수도 좋은 자리였다고 격려했다.
이 날 마침 정치학과와 국제관계학과 연구원들의 와인 파티가 있어 들렀는데, 몇몇 교수와 연구원들이 환영해주었다. 특히, 땀페레 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는 평화연구소가 부설돼있어 국제분쟁과 인권 이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핵과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아랍의 민주화와 시리아 사태 등에 대해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새삼 우정과 연대감이 자라났다. 나의 박사논문 주제는 북유럽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이 곳에 있는 동안 평화, 인권, 국제관계 등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할 계획이었는데 구체적인 매개 공간을 발견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논문 프로포잘 이후 지금은 논문의 2장과 3장에 해당하는 파트를 쓰고 있는 중이다. 2장은 북유럽 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제도적 발전 과정, 최근의 변화와 이슈 등을 간략하게 개관한다. 3장은 논문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는 부분인데, 합의 민주주의 이론을 둘러싼 논쟁을 검토해 본론에서 전개할 경험적 비교 연구를 위한 이론적 관점과 접근 방법, 세부 분석 기준 등을 제시할 계획이다. 5월말까지 우선 2장의 저술을 마무리할 목표로 지금 한창 초안을 작성하고 있다.
그 사이 박사과정생을 대상으로 한 방법론 워크숍에도 참석하고, 연구 방법론 관련 서적과 인터넷 강의 등을 참고해서 장거리 마라톤 주자로서의 준비를 다져오는 중이다. 특히, 매일 2~3시간씩 계속 글쓰기를 하라는 캠브리지 대학교 인류학과 알란 맥팔래인(Alan Macfarlane) 교수의 조언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이라면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꼭 참고하시기 바란다.(http://www.youtube.com/watch?v=LlEeTsHBj98)

4.     선재의 배움
선재는 이제 제법 영어 유치원에 익숙해졌다. 8월부터 다니게 될 핀란드 예비학교(pre-school)도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방과 후에 함께 놀 친구들이 아직 없고, 책과 장난감도 부족한 터라 심심해한다. 아빠랑 놀이터를 가거나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큰 즐거움인데, 아빠는 늘 공부해야 한다며 실컷 놀아주질 못하니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한국에서 그리스신화와 무민 동화책과 몇 권의 과학책 등을 새로 부쳐왔는데 금새 수없이 반복해서 다 읽어버리고, 지금은 아빠가 들려주는 삼국지 이야기에 빠져있다. 5월에 다시 책들을 여러 권 구해주어야 할 모양이다.
기특한 것은 글씨 연습을 처음 시켜보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 부쩍 재미있어하며 글쓰기를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글도, 영어도 곧잘 따라 쓰고 있어 칭찬을 많이 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나씩 배우고 익혀 터득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마도 부모로서 가장 기쁘고 복된 순간인 듯 하다.
, 땀페레 시립 도서관에는 핀란드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토베 얀손(Tove Jansson)과 무민 이야기(Moomiin Stories)에 헌정된 박물관이 있어 그 사이 선재를 데리고 두 번 다녀왔다. 무민은 참 사랑스러운 동화인데,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연친화적이고, 평화롭고, 가끔 엉뚱하고 기발한 핀란드 사람들 특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잘 표현돼 있는 것 같다.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일독을 권한다. 핀란드에 여행오시는 분들도 한 번 들러 보시길



선재의 글씨 연습


토베 얀손과 무민 이야기의 일러스트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