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6일 일요일

"저녁이 있는 삶"

지난 주 수요일로 선재가 다니는 어린이 축구 클럽이 올 시즌 마무리를 했다. '9월 중순인데 벌써?' 하겠지만, 이미 이곳 날씨는 늦가을 느낌이 물씬하다. 집을 나서면 아침 공기가 찬 것이, 꼭 한국의 시월 말이나 십일월 초순 쯤은 되는 것 같다. 자작나무 숲에도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아직 많지는 않지만 낙엽도 제법 굴러다닌다. 다가오는 겨울의 예감으로 가끔 약간의 긴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늘이 더욱 높아지고 푸르러져 마음까지 환해질 때가 많다.

여하간, 4월부터 시작된 축구 클럽은 이제 마무리가 되고, 클럽 활동도 아이스하키나 스케이트, 실내 축구 등 겨울 스포츠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그 마지막날 행사로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모여 팀을 나눈 대항전을 치루고 조촐한 과자 파티를 벌였다. 여름을 지나면서 부쩍 자란 아이들은 어느덧 실력을 뽐내고, 엄마 아빠들로 구성된 부모팀은 표나지 않게 져주느라 애를 썼다. 아빠들은 살살 차는데 엄마들은 최선을 다하는 차이가 있기는 하더라만..ㅎㅎ 나도 즐겁게 참여해 선재와 함께 공을 다투었다. 결과는 아이들이 7대4로 역전승!

유쾌한 웃음, 그리고 아이들과 줄지어 하이파이브하며 경기를 마무리하고, 부모들이 십시일반 준비해온 과자와 음료를 함께 나누었다. 입가에 초코 가루를 묻혀가며 맛있게 과자를 먹는 아이들을 보노라니, 만국의 어린이들은 과자를 좋아한다는 진리가 확인된다. 선재도 그 틈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지치지 않고 열심히 과자를 먹는다.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소박한 순간인데, 또 생각해보면 참 예쁘고 고마운 광경이다. 그 동안 따뜻하게 선재와 우리 가족을 환대해준 코치들과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고맙고, 처음엔 말없이 무뚝뚝한 것만 같던 다른 부모들도 어느 결엔가 미소로 반겨주어서 고맙다. 무엇보다 별 다툼이나 불화없이 선재를 잘 받아들여준 다른 핀란드 아이들이 고맙고, 그 동안 잘 적응하며 뛰어놀아준 선재도 대견하다.

나아가, 복지국가 핀란드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축구 클럽에 참여하는 이 평범한 핀란드 시민들의 '저녁이 있는 삶'이 참 부럽게 느껴진다. 이곳 직장인들은 대개 오전 8시쯤 출근해 오후 4시면 집으로 돌아간다. 오후 5시 30분에 시작되는 축구 클럽에는 엄마, 아빠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온다. 유치원이나 예비학교에도 많은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려오고 또 데려간다. 그것은 이제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나의 생활 양식(life-style)로 정착돼있는 느낌이다.

최근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른 우리 사회, 얼마전 민주당의 손학규 예비후보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그를 깊이 신뢰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 슬로건만큼은 탐이 난다. 또, 이 슬로건은 일찌기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의 보좌관으로 한국의 각종 선거 결과와 부동산의 상관관계를 파헤친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펴낸 손낙구씨가 입안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진보적 지향과 정책 역량을 겸비한 우리 사회의 드문 인물인데, 결국 여러 사정으로 진보정당에 머물지 못하고 지난 해 손학규씨의 정책 보좌관으로 채용돼 세간의 안타까움과 화제를 모았다. 이번 슬로건에서 그의 안목과 역량이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저녁이 있는 삶!" 그것은 모든 것을 소모시켜버리는 획일적인 장시간 노동과 학습 체제에서 벗어나 "창조적으로 일하고 온 몸으로 배우는 삶", "남녀가 평등한 삶", "아이들이 행복한 삶", "가족과 공동체를 가꾸는 삶"으로 전환해야 함을 간결하고 쉬운 말로 웅변하는 듯하다. 이 멋진 문구가 함축하고 있는 것, 우리 시대의 많은 평범한 직장인과 생활인들의 열망이 꼭 실현됐으면 좋겠다. 이번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예비경선에서 과반 득표를 통해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씨도 얼마든지 이 좋은 슬로건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 전에, 불필요한 초과 노동과 학습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 자신부터 고개를 쳐들고 주위를 둘러볼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 중독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많은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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