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3일 목요일

아이슬란드 재발견(1): 2008년 금융 위기의 성찰과 교훈

20141 22(), <기자협회보>에 실은 칼럼입니다. 북유럽에서도 변방의 작은 섬나라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관해 썼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재발견!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최신호에 실린 올라푸르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 인터뷰를 읽으며 여러 측면에서 이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거든요. 무엇보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명료한 성찰이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아울러, 다음 칼럼에서는 금융 위기 이후 헌법 개정 등을 단행한 아이슬란드의 민주적 혁신에 대해 한 번 더 다루려 합니다. 칼럼은 그의 인터뷰 기사에 더해 올라푸르 대통령의 지난 수년 간의 연설문과 주요 해외 언론 보도, 관련 학술 논문 들을 추가 참조했습니다.

1월이 어느덧 하순으로 접어들었는데, 지금 핀란드에는 뒤늦게 찾아온 한파가 매섭습니다. 어제 오늘, 땀뻬레도 영하 25도의 강추위네요. 한겨울 추위에 늘 건강하시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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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재발견(1): 2008년 금융 위기의 성찰과 교훈
[글로벌 리포트 | 북유럽]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연구원

미국의 저명한 국제관계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신년호에 아이슬란드 대통령 올라푸르(Ólafur Ragnar Grímsson)의 인터뷰가 실렸다. 아이슬란드 대학의 첫 정치학 교수였던 그는 1996년 아이슬란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5번째 연임하고 있다. 정치적 지혜가 풍부한 이 학자 정치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는 북대서양 꼭대기에 위치한 인구 32만의 작은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중세 이래 덴마크 지배를 받은 아이슬란드는 1944년 독립한 뒤에도 냉전 시기 미·소 열강의 핵무기 경쟁과 대립의 한복판에 있었다. 북극권의 혹독한 기후 환경과 국제정치적으로 위태로운 지정학적 조건에 놓인 가난한 수산업 국가였던 아이슬란드는 1990년대 들어 산업구조의 전환을 꾀한다. 당시 유행을 따라 영미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받아들여 많은 산업을 민영화하고, 특히 은행 등 금융 산업의 탈규제와 자유화를 단행했던 것.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금융산업 팽창과 이들이 견인한 국내총생산(GDP) 성장 행진이었다. 비슷한 경로를 채택한 아일랜드와 더불어 아이슬란드는 새로운 모델 국가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해외 은행과 투자자들의 돈을 무분별하게 빌려다 쓴 사설 은행들은 국가 GDP의 10배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 지속 불가능한 경제 시스템은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뒤 직격탄을 맞고 무너진다. 2008년 가을 아이슬란드 정부는 재무자산 동결 조치와 함께 사설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이웃 북유럽 국가들, 심지어 중국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한 올라푸르 대통령의 명료한 자기반성이었다. 어떻게 은행들이 그렇게 커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1980년대부터 서구에 만연했던 이데올로기는 더 많이 규제를 완화하고, 더 많이 사유화하고, 더 많이 금융 시장에 자율권을 줄수록 우리 모두 더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뿐 아니라 서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우리 모두 자본주의는 주기적 위기의 시스템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잊었지요. 우리는 얼마간, 자본주의가 더 이상 위기의 시스템이 아니라 해마다, 또 해마다 계속 성장하는 공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올라푸르에 따르면 위기 이후 아이슬란드는 대법관을 책임자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은행은 물론 재계, 정부, 대통령, 언론, 대학 등 모든 책임 주체들의 실패를 조사해 보고했다. 특별검사를 임명해 다수의 전직 은행장들을 기소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중앙은행과 금융 규제 당국의 리더십을 일신하고, 많은 법적, 규제적 변화를 단행했다. 철저한 국가적 반성과 조치를 통해 아이슬란드는 2008년 금융 위기의 교훈을 공동체의 역사 속에 아로새기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2011년 8월 IMF 위기관리 체제를 종료했다. 2012년부터는 2% 내외의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 실업률도 약 5%로 유럽 국가들의 평균보다 낮다. 아직 많은 시민들이 경제위기의 여파로 고통받고 있고 유럽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위기의 터널을 잘 빠져나온 것으로 평가된다. 역설적으로 금융위기 직후 관광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재생에너지산업과 북극권 개발 협력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했다. 우수한 교육과 복지 시스템의 기반 위에, 풍요로운 신화와 문학적 전통에서 나오는 문화 부문의 창조력도 빼어나다.

하나 특기할 것은 금융 산업으로 흡수되던 우수한 인재들이 다른 분야로 진출하면서 IT 산업 등의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올라푸르는 말한다. “은행들이 무너지기 전까지 우리는 은행들이 수학자, 프로그래머, 컴퓨터 과학자를 고용하는 하이테크 기업이 됐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나 은행들이 무너졌을 때, 이 뛰어난 인재풀이 갑작스레 시장에 나왔고, 이들 모두 6개월 내에 하이테크와 IT 회사들로 채용했습니다. 지난 4년 간 이 분야는 위기 이전 4년보다 더 발전했지요. 제가 월스트리트의 많은 친구들에게 말하는 아이슬란드 경험의 한 가지 교훈은, 당신의 국가를 21세기 경제에서 경쟁력있게 만들고 싶다면 큰 금융 산업은 근본적으로 나쁜 뉴스라는 겁니다.”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 Ólafur Ragnar Grímsson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의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한 대통령 공관. 방문객들도 종종 대통령을 만나 인사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꼭 방문해보고 싶은 곳.


2008년 11월 금융 위기 당시 의회 의사당 앞에 모여 시위하는 아이슬란드 시민들. 30만 인구의 약  2%인 6천여명이 집결했다고 한다.
 
 
 
<Foreign Affairs> 2014 1-2월호, 올라푸르 대통령 인터뷰 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