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8일 월요일

핀란드 복지국가의 풍경

한림대 정치경영연구소의 제안으로 <프레시안>(2013.2.18.)에 기고한 글입니다. 지난 1년 이곳에 정착하며 보고 느낀 핀란드 복지국가의 풍경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그 동안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하느라 따로 글을 올리지 못했네요. 틈나는 대로 다시 핀란드와 북유럽의 복지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글쓰기를 계속하려 합니다. 새봄에도 늘 건강하시길 빌며...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30215111250&section=03

[정치경영연구소 유럽르포]
 
<2> 땀뻬레 시내버스에서 만난 핀란드 복지국가
 
뒤늦게 핀란드로 유학을 떠난 이유
나는 지금 핀란드 땀뻬레(Tampere) 대학교에서 핀란드와 북유럽 국가의 의회, 민주주의, 시민 참여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유학 오기 전에는 주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주로 인권 침해 분야의 조사구제 활동과 인권정책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다. 정신장애인, 이주노동자, 복지시설 생활인, 학생운동선수 인권 보호 등에 특히 많은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차별받고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영화 '도가니'가 보여주듯,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현실이 가능한가에 대해 자주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2001년 법률에 의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뒤 많은 제도 개선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있었지만, 현장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의 실제적 삶의 현실이 개선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인권의 참다운 실현을 위한 조건과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안게 되었고, 민주주의, 인권과 시민권, 복지국가의 연관 고리를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북유럽 국가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

나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청될 것이라고 여겼고, 그 적극적 실천 모델의 하나로서 북유럽 사회를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몸으로 부딪쳐 살아보기를 원했다.

그렇게 2009년 말 인권위를 그만두고, 2년 남짓한 모색과 준비 끝에 땀뻬레 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아 핀란드 유학길에 올랐다. 아내와 여섯 살 아들의 손을 잡고 헬싱키 공항에 내린 때는 2011년 12월의 어느 오후였다. 오후 세시도 되기 전에 도시는 어두워졌고, 거리엔 눈이 한 길 높이로 쌓여 있었다. 핀란드의 첫인상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춥고 긴 겨울 풍경이었다.

▲ 핀란드 땀뻬레 시청 앞 광장의 겨울 풍경 ⓒ서현수


그러나 견고하게 설계되고 건축된 건물들 내부는 아주 따뜻하게 난방이 들어와 위안이 됐다.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에도 길을 나서 걸어가는 동안은 제대로 춥지만 일단 버스를 타거나 건물 안으로만 들어가면 금세 따뜻한 기운에 몸이 녹았다.


시내버스에서 만나는 복지국가

버스는 인구 22만 명의 핀란드 내륙의 대표적 산업도시 땀뻬레의 주 대중교통 수단이다. 이곳의 버스는 거의 항상 제시간에, 아마도 칸트보다도 더 정확하게, 도착하고 출발했다. 그리고 역시 예상했던 대로 버스에는 유모차가 많았다. 버스의 한가운데에는 널찍한 공간이 편리하게 설계돼 있어서 유모차 두 대가 동시에 승차할 수 있다. 어떤 날은 유모차 세 대가 함께 타고 가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신속한 승하차를 재촉하는 버스 기사도 없고, 시간이 지연되거나 공간이 비좁다고 불평하는 승객도 없다. 게다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승차하는 경우는 어른도 버스비가 무료이니 번거롭게 카드를 찍을 필요도 없다. 자연히 어린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외출과 행동반경이 자유롭고, 버스 이용도 장려되는 셈이다.

비단 유모차만이 아니다. 신체 장애인과 이동 보조기구를 가진 노인들도 땀뻬레 시내버스의 교통 편의시설서비스의 주 이용자들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카트기에 몸을 의지한 노인, 그리고 유모차가 공존하는 버스 안의 풍경을 보면서 이곳이 복지국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 땀뻬레 시청 광장 앞의 버스 정류장 풍경 ⓒ서현수

버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버스에 오르면 늘 많은 수의 노인들을 만날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많은 노인들의 옷차림새와 표정, 그들 사이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복지국가가 사람들을 얼마나 평등하게, 그리고 존엄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곳에도 부자가난한 이가 있지만 그 격차가 우리처럼 크지 않고, 인구의 대다수는 중간 지대에서 비교적 평등하게 생(生)을 영위하는 듯싶었다.

또 특이한 것은 낮 시간대의 버스에 어린이들도 많이 탄다는 것이다. 수업의 일환으로 시내에 외출을 나온 학생들이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들까지 정기적으로 그룹을 지어 박물관으로, 연극 공연장으로, 도서관으로, 수영장으로, 호숫가와 숲 속 공원으로 외출을 나오는데, 이들이 시내버스의 또 다른 중요한 이용자들이다.

대단할 것 없는 소박한 일상의 도시 풍경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사회 공동체의 한 주체이자 동등한 참여자임을 보여주는 한 장면으로 다가왔다. 나아가, 교육이 지역사회와 별개로 구획된 자신들만의 담장 안에서 꼭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하다. 안전교육 환경, 보편적 교육 복지, 창의적인 교육 방식과 높은 학습 성취도를 자랑하는 핀란드 교육 시스템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또 하나의 대목이다.

실제로 내가 거주하고 있는 깔레바(Kaleva) 지역의 일부 고등학교들은 아예 지역 도서관, 시민대학과 함께 건물을 공유하기도 한다. 즉, 고등학교이면서 지역 공공도서관이고, 또 성인들을 위한 제2의 직업교육과 시민교육이 이루어지는 평생학습기관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히 남녀노소, 거의 모든 인구계층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엇갈리는 공공장소가 된다.


▲ 깔레바의 땀메르꼬스끼 고등학교(Tammerkosken Lukio). 쌈뽀 도서관(Sampolar Kirjasto)과 노동자 시민대학(Työväenopisto)이 함께 들어서 있다. ⓒ서현수

재단과 기업을 운영하는 학생회와 대학생 복지

핀란드에 도착한 뒤 우리는 땀뻬레의 대학 연합 학생회(TAMY)가 운영하는 학생주거재단(TOAS)에 신청해 학교 근처의 아파트를 하나 얻어 살고 있다. 학생회가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니 언뜻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59년 설립된 이 재단은 2011년 기준 67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저렴하고 안정된 주거 공간 등 '학생 친화적'(student-friendly)인 주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학생회는 'Juvennes Corporation'이라는 별도 기업 법인을 설립해 이 지역 대학들의 레스토랑과 카페 등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역시 저렴한 가격과 좋은 품질의 음식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데, 석사 과정 이하의 학생들은 약 2.7유로(EURO)의 싼 가격에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이처럼 핀란드에서 학생회는 노동조합과 더불어 시민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학 이사회에는 교수, 직원 대표와 더불어 동등한 숫자의 학생 대표가 선출돼 학교의 정책, 예산, 운영 전반에 관여한다. 또, 정부의 대학 교육 정책에 대해서도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 집단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무튼 학생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이곳 대학생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함께 동거하는 학생들이 참 많았다. 기본적으로 몸(body)과 성(sex)에 대해 무척 개방적인 이 사회의 문화와 연관될 테지만, 더 현실적으로는 재정적 측면의 이유가 작용하는 듯했다.

핀란드의 대학생들은 학비가 없을뿐더러 한 달에 약 300유로의 보조금(Guarantee)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다. 또 정부 보조금에 상응하는 액수를 장기 저리에 졸업 후 갚는 조건으로 정부가 대출해준다. 게다가 교통비, 학교식당, 공연 관람과 각종 입장료에서 학생은 거의 반값 할인을 받는다. 자연히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된 생활이 가능하다.

나아가,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 매월 4~500유로가 넘는 부모 수당(Parental allowance)과 각종 아동 용품이 정부로부터 3년간 지원된다. 또 만 17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는 매달 100유로 이상의 아동 수당(Child benefit)도 아이의 수만큼 지원된다. 여기에 범죄가 거의 없는 안전한 사회 환경, 어린이집부터 대학까지 이루어지는 무상교육, 출산과 예방접종 등 무상에 가까운 의료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개인이 느끼는 출산과 양육의 부담이 현저히 낮다.


경계 넘기의 어려움, 복지국가의 안과 밖

다만, 이런 보편적 복지국가의 사회보장과 서비스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민자와 EU 바깥의 외국인(유학생 포함)에 대한 진입 문턱은 상당히 높고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지난해 우리 가족도 몇 번이나 이런 문턱을 경험해야 했다.

핀란드의 각종 사회보장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정부 사무소를 '껠라'(Kela)라고 한다. 부모 수당, 아동 수당, 학생 보조금, 실업 수당, 장애 수당, 주거 수당, 퇴직 연금 등의 수급 자격 심사와 지급 결정이 모두 이 사무소에서 이루어진다. '껠라' 사무소를 가보면 10여 개의 상담 부스 앞 벤치에 번호표를 쥔 사람들이 각종 서류를 들고 대기하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시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사회복지의 핵심 기관이지만 이용자로서는 얼마간의 관료적 절차를 감내해야 한다. 신청서를 접수한 뒤 결정을 받기까지는 통상 여러 주의 시간이 소요되며, 추가 증빙을 요구받는 경우에는 다시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면서도 방문하기를 싫어하는 기관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이 '껠라'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자격을 얻으려면 2년 이상에 해당하는 고용 계약서나 이에 상응하는 장학금 증서를 제출해야 한다. 여기 처음 오면서 나는 땀뻬레 대학교의 입학 허가만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박사과정 대상의 장학금을 최대 1년까지만 제공하고 매년 다시 선정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장기간의 외부 장학금을 받지 않는 한 이 요건을 갖추기가 불가능했다.

다행히 나의 경우는 지도교수가 핀란드 학술원(Academy of Finland)에 제출한 연구 프로젝트가 선정되면서 2012년 9월부터 4년간 연구원으로 고용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나와 우리 가족의 '껠라' 서비스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정확한 규정을 모른 채 두 차례 신청서를 접수했다가 기각 통보를 받은 뒤였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도 이곳의 공공 의료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됐고, 우리 아이에 대한 아동 수당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매년 시 경찰청의 이민사무소에 가서 비싼 수수료를 물고 수개월을 기다려 갱신해야 하는 거주 허가(Residence Permit)도 고용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까지의 장기 거주 허가로 발급받았다. 마치 '난민(Refugee)에서 시민(Citizen)으로' 옮겨가는 느낌이었다.

더불어 나의 아내는 산업고용사무소에 구직자로 등록하고 고용 서비스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담당 직원과 두 차례의 상담을 거쳐 개인 통합 계획(Individual Integration Plan)을 설계했다. 그 뒤 이민자 직업 훈련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풀타임 핀란드 어학 코스에 무료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매월 수백 유로의 노동시장 보조금(Labour market subsidy)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나 더 특기할 것은, 이러한 사회보장의 토대에 높은 조세율과 투명한 징세 시스템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용계약서를 체결한 뒤 첫 월급을 받기 전에 반드시 개인이 직접 세무서를 들러 계약 내용과 연소득을 신고하고, 이에 근거한 개인 세율과 세액이 기재된 세금 카드(Tax Card)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훨씬 높은 세금이 추징된다. 세무서를 다녀오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공적 부조와 사회보험, 보편적 사회서비스의 재원이 어디서, 어떻게 마련되며, 다시 어떻게 시민들에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핀란드 복지국가의 도전과 함의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의료, 교육, 주거, 고용, 육아 등 삶의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핀란드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 나도 조금씩 감을 잡게 되었다. 어쩌면 높은 사회보장과 보편적인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만큼 그러한 사회적 권리(social rights)의 자격 요건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최근에는 시장 환경과 사회구조의 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자녀육아 수당이나 대학 교육의 재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집권 보수당(NCP)의 주장이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기존의 관용적인 이민과 난민 정책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면서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정 지원에도 반대하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 '핀란드 사람들'(The Finns Party)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반면, 이민자와 외국인에게 여전히 배타적인 제도적 시스템과 문화적 폐쇄성을 비판하는 공론장의 목소리도 계속 들려온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통찰해 볼 때, 1990년대 초반 소련 몰락 이후 심각했던 경제위기의 기억과 최근 유럽연합 국가들의 재정 위기의 현실을 모두 직시하고 있는 핀란드 사회는 복지국가 시스템과 정부 재정의 건전성을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2008년 이후 세계경제 위기에 따른 경제 침체 국면과 핀란드의 대표 기업인 노키아의 고전 속에서 핀란드도 실업이 증가하는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실업 문제가 사회통합을 위협할 만한 상태로 발전되지 않고 안정적인 복지 서비스와 고용 지원 정책을 통해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다. 또, 남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정 지원으로 최근 정부 재정이 적자로 전환되었음에도 유로존(Eurozone) 국가 중 가장 높은 AAA 신용등급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 속에 핀란드 모델의 강점이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IMF 외환위기' 등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오히려 더욱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와 집단적 불안, 그리고 사회통합의 위기를 겪어 왔다. 최근 경제 민주주의와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전환이 여야를 넘어 공통된 정치적 노선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선거철 득표를 위한 임시방편의 정치적 수사에 결코 그쳐서는 안 될 절박한 사회적 요구가 그 안에 놓여 있을 터이다.

북유럽의 변방에서 식민지와 내전, 전쟁의 고난을 딛고 20세기 후반 복지국가의 건설과 혁신적 지식경제 모델로의 전환에 성공한 핀란드 사회의 경로가 우리에게도 좋은 참고 좌표가 되기를 바란다.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