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1일 토요일

선재의 핀란드어 배우기

1.

선재가 예비학교(Pre-school)을 다닌 지 3주가 흘렀다. 선생님들은 친절하고, 학교는 안전하며, 아침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교정 풍경은 늘 자유롭고 행복해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 이 어린 아이가 어떻게 적응할까? 무엇보다, 말이 통하질 않는데,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까? 그런 생각에 우리 부부는 늘 노심초사하며 선재를 학교에 보내고, 또 학교에서 데려오곤 한다. 선생님들도 칭찬을 많이 해주고, 애초 우리의 기대보다도 더 잘 적응하고 있어 고맙지만, 역시 문제가 없을 순 없다.

사례를 들자면, 처음 며칠이 지난 뒤 선재가 "엄마, 어제부터 어떤 얘들이 나보고 핀란드어 못한다고 놀려. 숫자도 kahdeksan(8)까지 밖에 못 센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소리야. 선재는 핀란드어로 숫자를 tuhat(1,000)까지 셀 줄 아는데!"하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떤 게임을 하는 데 선재가 규칙을 잘 몰라 헤멨던 모양이다. 핀란드 아이들도 이해가 되고, 선재도 이해가 된다.

또, 지난 주엔 선재가 아이들과 오후에 축구를 하다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다투었다 한다. 다른 아이들 넷이 자기들끼리 편을 먹고 선재를 끼워주지 않아 많이 '앵그리(angry)'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그 광경을 보고 말려서 금방 상황은 종료됐지만, 선재는 분이 나 펑펑 울었다고... 아내도, 나도 마음이 참 애잔하다. 한편으로 선재를 위로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선재를 설득한다. "선재야, 그래서 화가 났구나. 친구들이 왜 그랬을까? 잘 했어. 그래도 말로 이야기해야지. 주먹을 휘두르면 안돼. 그건 폭력이 되거든. 알았지?"

사실 선재는 성정이 차분하고 진지한 아이다. 한국에서라면 오히려 너무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고 걱정했을 법하다. 그런데, 이곳 핀란드는 아이들도 정말 조용하고 내면적인 느낌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어린이 문화 속에 스며들어있는 경쟁, 획일, 억압, 폭력의 성향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때로 끼리끼리 무리를 짓기는 하지만, 우리 아이들처럼 어른들로부터 강요받은 억압을 해소하느라 내지르는 폭력과 왕따의 유희는 아니다.

하지만, 선재로서는 이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하루에도 여러 번 답답한 상황이 연출될 수 밖에 없을 터. 그러므로 선재가 하루 빨리 핀란드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나는 생각해왔다. 그래서 가능하면 집에서도 선재에게 핀란드어 단어나 표현을 연습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난 주 어느날, 선재 선생님이 예비학교에 다니는 이민자 어린이들을 담당하는 핀란드어 교육 전문가(specialist)와 함께 모임을 갖자고 일정을 잡을 때 '역시 핀란드!'라고 감탄하며 무척 기뻤더랬다.


2.

8월의 마지막 날, 그 모임 날이 됐다. 아내와 오후에 학교 앞에서 만나 몇 가지 의논을 한 뒤 시간에 맞춰 교실로 들어갔다. 핀란드어 교육 전문가, 그리고 선생님 두 분과 우리 부부는 책상을 마주 하고 앉았다. 주로 스페셜리스트가 대화를 주도했는데, 그 말씀이 내가 생각했던 예상을 벗어났고,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감탄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영어가 가능하십니까? 만약 어려움이 있다면, 한국어 통역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선재와 같은 이민자 어린이들이 핀란드어를 익혀 소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저는 이 지역의 담당자로 약 30개 그룹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 아주 바쁩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양식을 가져왔으니 동의가 되시면 사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로그램은 모든 어린이들에게 개별적인 수준에서 계획(planning)되고 진행됩니다. 아이들마다 기질과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2월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1차 평가합니다. 평가 결과에 따라 일반 초등학교에 곧바로 진학할 지, 핀란드어 공부를 집중적으로 익히는 그룹을 편성할 지 판단하게 됩니다. 10월경에 다시 교사들과 모임을 갖고 선재의 핀란드어 배우기를 중간 점검할 겁니다."

"어린이가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모국어(native language)를 잘 하는 것이 우선 필요합니다. 모국어를 잘 구사하면 외국어를 더 쉽게 익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에서는 모국어를 잘 하는데 초점을 두십시오. 선재에게 핀란드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전혀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선재에게도 핀란드어 배우는 데 전혀 스트레스를 주지 마십시오."

"선재는 지금 핀란드어 배우기에서는 2주짜리 간난아기(baby)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전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천천히 말하는 것을 익히게 됩니다. 선재도 그렇게 할 겁니다. 다행히 선재는 똑똑한 것 같습니다. 이미 많은 말을 배우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간난아기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3.

모임이 끝나고, 우리 부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학교를 걸어나왔다.

"선재는 잘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 빨리 핀란드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집에서도 선재가 핀란드어를 익히도록 적극적인 태도와 환경을 준비해주면 좋겠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그런 정도의 대화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이날 모임은 예상 밖이었고, 상당한 충격과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이민자에 가까운 우리의 입장에서 느낄 수밖에 없던 조바심을 정면으로 깨뜨려버렸다.

'그렇지! 모국어를 잘 해야 외국어도 빨리 배울 수 있지! 선재는 지금 간난아기와 같구나. 천천히, 지금의 상황에 맞추어 나아가면 되겠구나.' 그런 깨달음과 함께 안도감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이 선생님들을 믿고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대화에서 내가 들은 말들은 한 전문가의 개인적인 철학과 가치관에 기반한, 예외적 진술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민자 자녀들이 핀란드어를 배우는 것의 중요성과 그 효과적 방법을 고민해온 핀란드 교육의 오랜 연구 결과들이 집적된 성취이자, 교육 현장의 행위자들이 함께 공유해온 실천적 지혜라고 생각됐다. 그 바탕에는 이민자들의 모국어를 이민자 아이들의 소중한 문화적 원천으로 인정하는 개방적 자세가 깔려 있는 것도 같았다.

모국어를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무조건 영어부터 가르치려드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조기 교육 풍토도 떠올랐다. 아주 어려서부터 완벽한 영어 학습 환경을 구비해줘야 한다는 상업적 교설들과 이에 쉽게 끌려다니는 부모들. 탐욕은 무명(無明)에서 비롯되고, 무지(無知)로 인해 강화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를 망치는 행위들이 지금도 널리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댓글 3개:

  1. 와...정말 엄청나네요. '핀란드'라는 나라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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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웹서핑하다가 글을 봤는데 퍼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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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처를 밝혀주시고, 상업적 이용이 아니라면 퍼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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