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HELSINGIN SANOMAT 읽기 - 핀란드 의회와 시민 발의 제도

1.

오늘 드디어 핀란드의 대표적인 일간신문 <Helsingin Sanomat>를 읽기 시작했다. 1889년 핀란드가 아직 러시아 대공국의 지위에 있던 시기에 <Päivälehti> ('일간신문'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간된 이 신문은 핀란드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옹호하다 러시아 제정의 압력으로 1904년 일시 폐간된뒤, 1905년 현재의 이름으로 재창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약자를 따 HS, 또는 애칭인 Hesari('헤자리')로도 불리는 이 신문은 핀란드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이다. 하루 평균 40만부 이상을 인쇄하며, 그 중 97 퍼센트가 정기구독의 형태로 가정에 배달된다. 핀란드는 물론 북유럽 국가 전체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한다. 2013년 1월 6일부터 판형이 변경돼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되고 있다.

나도 오늘부터 정기구독을 신청해 아침에 받아든 신문을 연구실로 가져가 하루 종일 인터넷으로 단어뜻을 찾아가며 기사를 읽었다. 기사 하나를 읽는데 백 개가 넘는 단어를 검색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핀란드어를 배운 지 일년 만에 신문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보람있다.


2.

한 기사는 특히, 나의 논문 주제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갖고 읽었다. 핀란드 민주주의 사상 처음으로 '시민 발의'(Citizen's Initiative, Kansalaisaloite)가 성사되어 의회에 제출된 것을 의회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시민 발의'란 최근 의회 중심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보완, 혁신하기 위해 서구 여러 나라에서 실험적으로 도입해 온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적 제도들 - 시민 합의 회의, 시민 배심원 제도, 심의 공론 조사, 시민 의회 등 - 중 대표적인 유형이다. 인구의 일정 비율이 넘는 수의 시민 서명이 있는 발의안을 의회에서 심의하도록 함으로써 시민 주도의 공적 의제 설정을 허용하고, 의회의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시민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마련됐다.

2011년 핀란드도 시민발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6개월 이내에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은 경우 이를 의회에 제출하여 공식 심의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이번에 처음 발의된 시민 발의는 핀란드에서 동물 모피 산업을 금지하자는 안으로 시민 7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문제는 시민 발의안이 의회에 제출된 뒤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세부적인 기준과 절차가 아직 합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핀란드 의회(Eduskunta) 의장인 Eero Heinäluoma (SDP, 핀란드 사민당)는 이번 시민 발의가 역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민주주의적 혁신 사례라며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의회 사무를 관장하는 Seppo Tiitinen 사무총장은 지난 화요일 Helsigin Samonat와의 인터뷰에서 의회가 시민발의안을 반드시 다루어야할 법적 의무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Tiitinen 총장의 발언에 대한 비판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회 의장단이 원내교섭단체들과 함께 시민 발의안이 의회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질 것인지를 정하는 문서를 마련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현행 의회 운영 절차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시민 발의안은 의회에 제출된 뒤 본 회의에서 예비 토론을 거친 뒤 의장이 정하는 적절한 상임위원회로 이관돼 심의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의회의 심의와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상임위원회(Valiokunta)가 시민 발의안을 소홀히 다루거나 단순히 부결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시민발의안의 옹호자들은 현행 헌법과 의회 운영 규칙에서 의회에 제출된 시민 발의안은 의원 100명이 서명한 입법 발의안과 비슷한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우선순위와 중요성이 의회 심의 과정에서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Tiitinen 사무총장 같은 이들은 시민 발의안의 심의와 결정에 관한 권한은 전적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대의 기관인 의회의 재량에 속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1906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보편적 선거권을 도입하고, 1907년 실시된 첫 의회 선거에서부터 여성의 피선거권을 포함한 온전한 참정권을 보장한 나라답게 핀란드는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매우 높은 편이다. 특히, 오랜 의정 활동 경력을 가진 엘리트 정치인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Tiitinen의 발언에는 의회의 의사 결정 과정을 더욱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에 대한 시민 참여의 기회를 획기적으로 넓혀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대한 이들 엘리트 정치인들의 마뜩찮은 심기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논쟁의 결과 시민 발의안에 대한 의회의 심의 절차와 의사 결정 방식이 정해지면 향후 시민 발의 제도의 운영 방향과 그 효과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충실한 대의 제도의 틀을 유지하려는 기성의 흐름과 새로운 심의 민주주의적 실험을 추진하는 혁신의 기운이 교차하는 가운데 핀란드의 의회가 어떤 길을 선택할 지 주목된다.


  • Helsingin Samonat 2013년 3월 13일판. 지난 1월부터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바뀌어 발간되고 있다.
 

  •  왼쪽 상단은 EU의 한 싱크탱크의 보고서에서 최근 유럽 재정위기를 통과하면서 핀란드의 평판이 EU의 '모범생'에서 독단적이고 근시안적인 '문제아'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는 기사이다. 핀란드는 그리스 금융 지원 방안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인 담보를 요구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 오른쪽 기사와 사진은 최근 이탈리아 총선 결과 이후 독일의 일부 경제학 교수들이 아예 EU 통화연합 폐지를 주장하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을 창당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유로 위기가 독일에서 계속되고 있다는 제목. 


  • 갑자기 불어닥친 3월의 대설과 한파로 프랑스, 독일, 벨기에, 영국 등 중서부 유럽 국가의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진과 기사. 


  • 최근 의회에 제출된 첫 '시민 발의'안을 두고 의회 내 심의 절차와 의사 결정 방식을 둘러싼 논쟁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 위 사진 속 인물이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Seppo Tiitinen 의회 사무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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