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18대 대선 소감 2 - 성찰, 혁신, 실천!

5.
 
이번에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 몇 일간 칩거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박근혜 정부 5년의 전망과 이른바 민주진보 정치세력의 과제는 무엇일까 하구요. 정리된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박근혜 정부가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예단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꾸로 몇 가지 주요 정책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가령, 남북관계에 있어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는 파격적 조치가 나올 수도 있고, 재벌 개혁이나 경제민주화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부터 김종인씨가 강조했듯이, 박근혜 당선인이 독일의 메르켈 수상을 모델로 삼아 보수층의 강력한 지지와 야당에 대한 유화적 스탠스를 토대로 개혁적 보수 정책을 펼치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 이명박 정부의 실패로 거론되는 정책들을 일정한 수준에서 개선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겠지요. 인사정책이나 4대강 사업, 그리고 언론, 검찰 개혁 등이 해당될 수 있겠습니다. 이 경우 김영삼 정부 초기와 같은 개혁 국면이 조성되면서 상당한 지지와 인기를 구가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지지도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박근혜 정부의 초기 정책이나 인사가 행해진다면 큰 대비 효과를 누릴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가정 하에서 민주진보진영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반대 투쟁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오히려 박근혜 정부가 이와같은 개혁 정책을 취할 경우 민주당은 이를 적극 인정해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제안을 하고, 가능한 최대한의 수준에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물리적 힘의 대결 논리가 아니라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상대의 에너지 흐름을 타고 차원을 넘어가는 접근입니다. 이를 통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주의,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정초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전후 독일(서독)의 경제적 재건과 민주적 성공을 이끈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사실 독일 사민당이 아니라 아데나워 총리가 이끈 기민당 집권기(1949~1963)에 첫 단추가 꿰어졌고, 이후 사민당 집권기에 더욱 공고해졌다는 역사적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겠지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또 어떤가요? 사민당이 보수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작한 사업이 극적인 냉전 해체의 국제정세를 타고 결국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이끌던 시기에 독일 통일로 결실을 맺지 않았습니까?
 
복지국가의 건설이나 남북의 평화 통일과 같은 사안은 특정 정치 세력의 헌신적 노력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물론 진보세력의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지금은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건설하고 그 합의의 프런트 라인을 한 발짝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임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셋째,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성공하는 개혁적 보수 정부의 길로 나아갈까요? 민주진보진영은 협소한 네거티브적 접근법의 관성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여당 정부에 대한 비판적 견제와 대국적 협상에 임하는, 높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이 또한 결론을 예단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대로 권위주의적 불통정부가 연장되는 것에 불과하고, 집권자의 의지 부족이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시늉만 내는 개혁이거나 오히려 개악되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 민주당부터 진보정당들까지 개혁 실패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다가 일정한 시점에서 중대한 정부 실패가 빚어지거나 사회적 저항이 확대되는 시점에 이르면 전면적인 반대 투쟁에 나서고, 결국 선거 때가 다가오면 별다른 정책적 준비와 실행 과정 없이 적당한 후보를 찾아 다시 정권심판론을 들고 나오는 수순도 예상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국제정세, 그리고 국내 시민사회의 갈등구조와 역학에 따라 부침하게 될 다양한 상황도 세밀하게 고려해야 할 변수가 되겠지요.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와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새로운 현실 인식과 대담한 자기 혁신, 그리고 이를 통한 한국 정치의 질적 전환의 가능성입니다. 박근혜 후보가 TV 토론에서 그래서 대통령이 되려고 하잖아요!”라는 말을 반복하자 네티즌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대통령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을 지금부터 하면 된다고 말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상을 찾아내 이를 반박한 일이 있었지요. 저는 지금 이 말을 멘붕에 빠져 허우적대는 민주진보진영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민주당이든 새로운 국민정당이든, 자신들이 집권하면 하려 하는 일들을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지국가 건설이든, 경제민주화 실현이든, 남북한의 평화 통일이든, 새정치 실현이든, 또 다른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5년간 입법과 정책, 현장의 실천과 운동, 국제적 협력과 시민사회 소통 등 모든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와 성과를 일구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정부에 협력하여, 때로는 정부를 비판하면서, 때로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면서 말입니다. 제발 민주당이, 안철수 캠프가, 진보정당들이 정신을 차리고 아프게 교훈을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6.
 
지난 5년의 경험과 이번 대선 결과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 역동적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를 이룬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이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특히, 헝가리에서 최근 보수주의 정당이 집권한 뒤 합법적 절차를 통해 헌법과 각종 기본적 법률과 제도를 자신들에게 영속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개악함으로써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가져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사례가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큰 것 같습니다.
 
새삼 민주주의란 결코 고정된 상()일 수 없으며, 일순간에 만들어지거나 도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끊임없는 시민적 성찰과 학습, 그리고 제도적-비제도적 실천을 통해 함께 기르고 가꾸어가야 할 무엇이겠지요. 민주주의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선거 이후 벌써 4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우울한 소식 들었습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매일 42.6, 매년 약 15,000명이 자살하는 등 OECD 최고의 자살률을 몇 년째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이 마치 무슨 내전을 치루는 나라처럼 극심한 불안과 스트레스, 위기감과 절박감을 던져주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방치한 채 어떤 정부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어떤 정치세력이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고 싶다면 선거 승리의 도취에서 빨리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개혁적 보수 정부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초기의 인수위와 내각, 청와대 인사는 그 방향을 가늠해볼 시금석이 될 겁니다. (빨리 윤창중 수석대변인 임명 철회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정치세력들이야말로 치열한 성찰과 혁신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입으로만 성찰과 혁신을 외지 말고 실질적인 변화의 노력과 가시적인 결과물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추상적 언명과 다짐은 이미 많은 시민들에게 식상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뼈저린 각성이 없다면 내일의 기약도 어려울 것입니다.
 
대선 패배 이후 당권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여있는 민주당에 말씀 드립니다.
 
당신들이 할 일은 노동자들의 자살 행렬에 대해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 형식적인 조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입법, 정책, 정치적 실천의 영역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다 하는 것이오!”
 

18대 대선 소감 1 - '힐링'에서 '성찰'로!

대선이 끝났습니다. ‘멘붕겪으신 분들 많을 텐데, ‘힐링은 다 되셨나요? 역사를 길게 보면 한 번의 선거라는 것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지난 5년의 세월이 워낙 재앙이었던 데다 박근혜 후보 뒤에 어른거리는 유신독재의 이미지가 겹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한 많은 시민들에게 이번 선거는 절박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울과 낙담을 털고 다시 시작할 때입니다. 역사는 비틀거리면서 전진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외부에서 원인을 구하지 말고, 남 탓부터 하고 보는 오래된 습관을 버리고, 더 밝아진 눈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핀란드에서 바라본 한국의 18대 대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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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 알려진 내용이지만 기록의 차원에서 일단 팩트부터 정리해봅니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났다. 20121219,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75.8%로 최근 세 번의 대선 가운데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선거는 아주 치열했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를 이룬 문재인 후보가 48%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박근혜 후보는 51.6%의 지지를 얻는 박빙의 승부였다. 이번 선거에서는 세대별 투표 성향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20대와 30대 그리고 40대는 문재인 후보를 더 선호했고, 50대 이상의 유권자들은 박근혜 후보를 더 선호했다. 특히, 인구 고령화에 따라 40대 이상의 유권자가 증가 추세에 있는 상황에서 90%에 가까운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한 50대가 박근혜 후보를 더 많이 지지한 점이 박후보의 당선에 가장 기여한 중심 요인으로 분석됐다. 지역 변수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서울과 호남에서 선전했지만 박근혜 후보는 인구가 많은 영남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원, 제주, 충청권에서 이기고 인천과 경기에서마저 우세한 득표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 후보는 서울에서 박근혜 후보를 단지 근소한 차이로 이겼고, 야당의 강세가 예측되던 경기, 인천에서마저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서 다른 지역의 열세를 만회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2.
 
많은 질문과 고뇌를 안겨준 이번 대선,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외신들이 전하는 대로, ‘독재자의 딸이 민주적 절차(선거)를 통해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개 정치학자들은 그것도 민주주의다”, 나아가 그것이 민주주의다라고 말할 텐데, 이번 선거 결과에 비판적인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는 차마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지난 5년간 집권한 이명박 정부의 파탄에 가까운 실패가 널리 인정되고, 정권교체와 정치혁신에 대한 대중의 높은 열망이 거듭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총선에 이어 야당이 또 다시 무기력한 모습으로 패배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실망과 우울을 겪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물론 48%, 1469만표의 지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기에 너무 낙담만할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오히려, 1987년의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가 채택해온 대통령 중심제와 소선거구제 의회 선거가 강요하는 승자독식(winner-takes-all)의 정치구조로 인해 이러한 민의가 정치적 대표 체계 속에 균형있게 반영되기 어렵다는 점이 상기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모델로 삼아온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훨씬 합의 지향적 민주주의(consensual democracy)를 운영하고 있는 유럽의 다수 국가들처럼, 이제 우리 사회도 비례대표제도의 전면 도입에 기초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을 포함해 개헌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선거라는 것은 언제나 돌발적 변수와 예측불가능한 요소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특정한 요소나 오류에서 사태의 근본 원인을 찾는 행태는 나약한 심성의 인간이 사후약방문을 찾는 격에 불과할 지도 모르지요. 예컨대, 50대의 높은 투표율과 이들 다수의 박근혜 지지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풍부한 정책과 관점을 마련하고 이를 호소력있게 재구성하지 못한 것이 문제이겠지요. , 이정희 후보의 막말과 토론 태도 자체가 50대의 이반을 불러왔다기보다는 - 물론 그도 큰 원인을 제공했겠지만- 이를 적절히 제어하고 또 훌쩍 뛰어넘는 토론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문재인 후보의 한계가 더 문제였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이 있다면,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 모두 토론과 연설 능력에서 현 단계 한국 사회가 요청하는 민주적 정치지도자의 수준에 크게 못 미쳤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후보의 경우 한국 현대사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운명의 크기 앞에 성실했던 그의 인생역정과 훌륭한 인간적 성품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치열하지 않더군요. 힘없는 시민들이 겪는 고통과 좌절에 대해, 지난 정부의 실정에 대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길과 이제 새롭게 열어갈 정치적 비전에 대해 그가 말할 때 더 정밀하면서도 명쾌하게, 갈구하는 시민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것이 참 아쉬웠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처음 기대했던 것에 비해 막상 정치적 공론장에 나타난 그의 태도나 언어가 너무 유아적인 듯해서 놀라고 실망했습니다. 그가 내놓은 새 정치의 구상이나 이른바 새로운 형식의 유세라며 진행하던 모습에서도 문제의 실질에 가 닿은 내용이나 메시지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가 강조해온 것처럼 공감과 소통 능력은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아주 중요한 미덕이자 기술이지만 무엇을, , 그리고 어떻게 실천하고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과 설득 없이 동화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에 참 의아하더군요.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이 보여준 행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이었지만, 안 후보는 결국 자기 한계, 곧 정치 세계에 대한 미숙한 사고와 내용적 준비 부족으로 인해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야권 후보의 정치적 미숙함은 단지 후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정당 체제의 허약함과 직결된 문제일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민주당을 잘 살펴보면, 분명한 정강정책을 가지고 공유된 정치적 이상을 위해 정치활동을 벌이는 현대적 대중정당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정치적 야망을 꿈꾸는 개인 명망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의 정치적 이상이나 정책 프로그램,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활동의 구심으로서 정당 조직의 발전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부르주아 정당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너무 박한가요? 부디 그런 것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누구라도 앞으로 대권 도전을 포기하고 10, 20년 뒤 민주당을 완전히 시민사회 속에 뿌리내린 새로운 정치조직으로 만들 포부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요? 미안한 말이지만, 1219일 저녁 민주당사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주요 인사들의 면면 속에서 저는 그러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안철수 후보와 그 캠프 또한 모호한 새 정치담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대중의 정치 불신과 혐오 정서에 편승해 반()정치적 수사와 급진적 대중주의(radical populism)에 가까운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또 다른 한계에 직면했다고 보입니다. 만약 안철수씨가 암중모색 뒤에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면 의회와 정당 정치, 민주적 국가운영 등에 대해 명료한 자기인식과 질적으로 달라진 비전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일부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이정희 후보의 언변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기준에서 본다면 그녀 역시 결코 토론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성찰이 결여된 그녀의 재빠른 말들과 (그가 누구이든)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선적 태도는 80년대 운동의 패러다임에 갇혀 어느덧 몰락해가는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을 고스란히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토론 역량에 대해서는 굳이 장황한 평가가 불필요할 듯 합니다. 다만, 대통령 후보로서 자격 미달에 가까운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은 15년 이상의 정치적 여정 속에서 정제된 측면이 있고, 그녀의 지지자들에게는 충분한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듯 보였습니다. 물론 선거방송토론위원회의 한심한 토론 룰과 주류 언론의 불공정한 보도 덕을 많이 보았지만요.)
 
4.
 
사실 우리 사회는 뛰어난 연설과 토론 역량을 단지 화려한 정치적 언변과 수사로 착각하거나 일종의 위선적 포장 정도로 여겨 등한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저는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이러한 관행적 인식을 이제 분명하게 재고했으면 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듯, 인간의 공적 인격은 말과 행위로 드러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더 명확하고 사려깊으며 일관성있는 사유와 언어 행위를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예외적 사례일지 모르지만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가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요? 물론 미국을 포함해 서구의 현대 민주주의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정치인들이, 나아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꾸준히 갈고 닦아야할 민주주의의 기술(arts of democracy)을 우리는 쉽게 건너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될 때가 많습니다.
 
화려한 수사와 치열한 논쟁을 즐기는 미국과 정치문화가 많이 다르지만, 이곳 핀란드에서도 인상깊은 것 중 하나는 유명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남녀노소의 일반 시민들, 심지어 아주 어린이들까지 가령 TV 화면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잘 피력한다는 점입니다. 잘 확립된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넘어 시민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린 민주주의 시민교육의 전통과 토론 문화, 평등한 사회의 질, 국가 권력과 언론과 시민의 수평적 관계 등이 그 배경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득권을 점하고 있는 상대의 문제점이나 선거 과정의 돌발 변수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우리 자신의 태도와 준비된 역량입니다. 그런데 선거 과정에서나 선거가 끝난 뒤에나 여전히 더 핵심적이고 중요한 차원에는 진지한 관심과 노력을 쏟지 않는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새삼 친노반노로 갈려 대선 패배 책임의 공방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이 여실히 이쪽의 실력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식이라면 3년 뒤, 5년 뒤에도 실질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어 더 걱정입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너는 아직 내 시야에 안 보이고...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1400여만 명의 선택에서 다시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첫 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정태춘 박은옥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막차는 생각보다 일찍 오니
눈물 같은 빗줄기가 어깨 위에
모든 걸 잃은 나의 발길 위에
싸이렌 소리로 구급차 달려가고
비에 젖은 전단들이 차도에 한번더 나부낀다
막차는 질주하듯 멀리서 달려오고
너는 아직 내 젖은 시야에 안 보이고
무너져, 나 오늘 여기 무너지더라도
비참한 내 운명에 무릎 꿇더라도
너 오늘 어둔 길모퉁이 돌아 나오려나
졸린 승객들도 모두 막차로 떠나가고
 
그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긴 긴 어둠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다시 올 봄의 화사한 첫 차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내 영혼 비에 젖어 뒤척였고
 
뒤척여 내가 오늘 다시 눈을 뜨면
너는 햇살 가득한 그 봄날 언덕길로
십자가 높은 성당 큰 종소리에
거기 계단 위를 하나씩 오르고 있겠니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 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걷혀 깨는 새벽 길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동영상] 정태춘 박은옥 노래 -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https://www.youtube.com/watch?v=5fnIwsKlx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