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4일 수요일

언론 자유와 공공성이 공존하는 북유럽 저널리즘

2013년 12월 4일자 기자협회보에 실은 칼럼입니다. 북유럽 언론 모델의 현황과 특징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무리했습니다. 방송의 공공성, 언론 자유, 높은 직업  전문성이 공존하는 북유럽 미디어 시스템의 특징을 '민주적 조합주의' 모델로 분류하는 전문가들의 논의를 소개하고, 이를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모델, 지중해권 주변의 단극적 다원주의 모델과 짧게 비교해보았습니다.

지면 제약으로 충분히 논의하지는 못했지만, 글을 쓰면서 2013년 현재, 우리나라의 미디어 시스템은 어떤 모델에 가까울까 계속 생각했습니다. 얼핏 지중해권의 단극적 다원주의 모델과 가까운 듯 싶지만, 요즘의 퇴행적 상황을 놓고 보면 민주화 이후 여전히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의 유산과 씨름하는 러시아와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그것에 더 흡사하지 않은가 여겨집니다. (아래 본문에서 소개한 Hallin과 Mancini의 2011년 연구를 추가 참조)

이 또한 길게 보면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우리 사회가 내면화하고 학습해가는 과정일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공론장의 토대 자체가 훼손되고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가장 염려됩니다. 특히, 언론인들의 직업 전문성과 자율성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나면 훗날의 언론 개혁조차도 기약하기 어려워질까 걱정됩니다.

북유럽 언론 모델에 관한 연재는 이번 칼럼으로 마치고, 다음 글부터는 북유럽 사회의 최근 이슈들을 주로 다루어볼 생각입니다. 12월에도 늘 건강하시고, 한 해 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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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자유와 공공성 공존하는 북유럽 저널리즘
[글로벌 리포트 | 북유럽]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연구원

북유럽 언론 모델을 찾아서 <4>

2012년 봄에 북유럽 미디어의 특징에 관한 땀뻬레대 저널리즘학과 위르끼 위르끼아이넨(Jyrki Jyrkiäinen) 교수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의 바탕에 합의적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는 시민문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터라 큰 관심이 갔다. 위르끼 교수는 과연 북유럽 저널리즘 연구의 전문가답게 상세한 데이터를 인용해가며 핀란드와 북유럽 미디어 시스템의 특징을 생생하게 전해줬다.

그런데 북유럽 미디어 모델의 특징을 논하면서 미디어 시스템 비교 연구의 권위자인 홀린(Hallin)과 맨시니(Mancini,2004)의 개념을 원용해 ‘민주적 조합주의(Democratic Corporatism)’으로 요약하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 민주적 조합주의란 북유럽을 포함한 중부 유럽 국가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사회적 의사결정 원리로 노동시장의 임금과 고용, 나아가 이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정책의 핵심 내용을 자본, 노동, 국가가 3자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미디어 시스템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민주적 조합주의 모델이라니, 언론학도가 아닌 나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의문은 나중에 두 저자의 책을 직접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야 풀렸다. 무엇보다 한 사회의 미디어 시스템은 그 사회의 정치적, 역사적 컨텍스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정치 체제의 구조적, 문화적 특징이 미디어 시스템에 일정한 패턴으로 조응해 나타난다는 설명에서 중요한 이해를 얻었다.

이들의 분류에 따르면 민주적 조합주의 언론 모델은 주로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에서 나타나며 이는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의 자유주의 모델, 그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지중해 주변의 단극화된 다원주의 모델과 구분된다.

민주적 조합주의 언론 모델의 특징은 우선, 신문 열독률이 높고 대중 신문이 일찍 발달했다. 둘째, 역사적으로 정당 연계 신문들이 강하게 발전하고 나중에 점차 중립적 상업신문들로 전환했다. 셋째, 저널리스트들의 직업 전문성이 강하고 제도화된 자기 규제가 작동한다. 넷째, 의회주의 혹은 사회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공영방송 거버넌스가 발전했다. 그러나 방송 보도에 관한 직업적 자율성은 매우 높다. 끝으로, 미디어 규제와 언론 지원 정책 등 국가 개입의 정도가 강하지만 동시에 언론 자유는 철저히 보호된다.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모델에서도 언론의 자유나 저널리스트들의 직업 전문성이 높게 나타나지만 이는 국가의 개입이 제한된 시장 지배적 모델로 최근 미디어의 상업화와 기업화, 독점 경향 등을 선도하고 있다. 영국은 BBC의 우수한 공영방송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최근 미디어 재벌 머독과 그가 소유한 언론사들이 보인 반민주적 행태들을 떠올려 봄 직하다. 반면, 단극적 다원주의 모델은 국가의 강한 개입과 약한 직업 전문성이 결합된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 모델의 취약성은 미디어를 장악한 뒤 정치권력까지 거머쥐고 국정을 농단했던 이탈리아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 사례가 잘 보여준다.

최근 북유럽에서도 미디어의 상업화와 기업화 등 많은 변화가 관찰된다. 언론의 상업화 경향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언론 미디어 조직들도 기존의 사회정치적 모델에서 벗어나 이윤 추구형 기업 모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는 미디어 비즈니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기업들의 주식이 시장에 상장되고, 미디어 대기업들이 성장했다. 복지국가의 위기론 속에서 우파 정권들이 집권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공공부문 개혁이 추진되던 시기다. 2000년대부터는 인터넷 기반의 멀티미디어 비즈니스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유럽의 언론 모델은 위에서 살펴본 민주적 조합주의 모델의 특징을 아직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신문 열독률이 하락 추세에 있지만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다. 방송 채널의 다원화와 상업화 경향 속에 공영방송의 시청률이 많이 하락했지만 지금도 다른 매체들에 비해 시민들의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방송의 공공성, 언론 자유, 높은 직업 전문성이 공존하는 북유럽 언론 모델의 진화가 주목된다.

[기자협회보 칼럼] 바로가기: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32409

*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위에서 소개한 Hallin과 Mancini (2004)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돼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바랍니다.

<미디어 시스템 형성과 진화>, 다니엘 C. 핼린, 파올로 만치니 지음 | 김수정, 정준희, 송현주 옮김 | 한국언론재단 | 2009년 10월 30일 출간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OnelineKor.laf?mallGb=KOR&barcode=9788957112366&linkClass=17130311&ejkGb=K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