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핀란드의 장애인 접근권(Accessibility) 예술 활동가를 만나다

  
1.
 
지난 9월 어느 날 땀뻬레 역 앞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핀란드 여성을 한 분 만났다. 거기에서 나는 이곳 대학생 친구와 핀란드어-한국어 교환 학습(language exchange)를 하고 있었다. 한참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한참 쳐다보더니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하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잠시 학습을 중단하고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우연한 만남은 아마도 하나의 사건이 될 것 같다.
 
이제 서로 친구가 된 이 여성의 이름은 Kirsi Mustalahti. 그녀는 핀란드에서 장애인 접근권운동(Accessibility for the people with disabilities)을 펼치는 문화 운동가이자 고전 연극 배우이다. 헬싱키 연극 아카데미(Helsinki Theather Academy)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서 활동해온 그녀는 2006년경 우연한 계기에 장애인 접근권 이슈를 접하면서 큰 영감을 얻어 이 운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장애인 접근권을 향상하기 위한 시민 축제와 문화 이벤트를 수차례 조직하고, 얼마 전부터는 접근가능한 예술 문화를 위한 협회’(Accessible Art and Culture Association, ACCAC)를 설립해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주된 관심은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문화 예술을 향유하고, 그 활동에 참여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특히 축제 기획자들을 교육, 지원하고,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예술가들과 협력하는 것, 나아가 이들 간의 국내적, 국제적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는 것 등이 그녀와 ACCAC의 주요 활동이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Kirsi는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다고 한다. 2010서울 공연 예술 마켓’(Performing Arts Market Seoul)의 훈련 프로그램에 전문가로 초청받고, 같은 해와 이듬해 한국-핀란드 예술 교류 행사에 계속 초빙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의 공연 예술 분야, 특히 장애 관련 문화 예술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해온 그녀는 올해도 한국을 방문해 장애인 접근권을 위한 여러 가지 문화 행사에 참여한다. , 12월에는 한국의 장애인 예술인들을 핀란드에 초청해 공연과 워크숍 등을 가질 예정이다. 이곳 땀뻬레와 헬싱키에서 열릴 12월의 행사에는 나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을 돕기로 했다.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 접근권과 모든 사람의 문화 예술 참여권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놀랍고 기뻤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하는 초기 내가 큰 관심을 쏟았던 이슈 중 하나가 정신장애인과 시설 생활 장애인의 인권 보호 문제였다. 아내도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10년 가까이 장애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 왔기에 우리는 한국의 장애 인권과 교육 현실에 대해 자주 대화를 나눠왔다. , 나는 인권위 후기에 '스포츠 분야 인권 향상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스포츠와 예술 등 문화적 접근을 통한 인권 증진의 가능성에도 관심을 가졌던 터였다.
 
2.
 
Kirsi와 나는 금방 관심과 지향이 통했고, 우리는 금세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지난 16일에는 Kirsi의 초청으로 땀뻬레 시의회 본회의실에서 열린 장애인 접근권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장애인 접근권에 관한 여러 연구와 프로젝트 결과가 발표되었다. Kirsi의 친절한 영어 통역에 힘입어 나도 이 발표들을 들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Kirsi의 권유로 위에서 말한 스포츠 인권 향상 프로젝트를 짧게 소개하고, 예술 문화적 접근을 통한 인권 증진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러나 분명, 이 날 세미나에서 내가 기여한 것보다는 내가 배운 것이 훨씬 컸다. 특히, NGO인 핀란드 청각 장애인 협회(Kuuloliitto Ry)Jukka Rasa(디자이너 겸 건축가)의 발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그 자신 청각 장애인인 Jukka는 청각에 어려움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겪는 다양한 어려움들을 풍부한 자료와 과학적 데이터, 그리고 아주 창의적인 전달 방식을 통해 설득력있게 제시했다.
 
예컨대, 사람의 음성(고음, 저음)과 음악(클래식, 대중음악) 등의 주파수 대역이 어떤 범위에서 전파되는지를 여러 선의 그래프로 보여주고, 일부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 청취 가능 범위 바깥의 소리가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일정 음역 대의 소리가 아예 전달되지 않거나, 흐릿하게 전달되거나, 이해 불가능하게 깨져서 전달되거나, 다른 배경 잡음과 섞여서 전달되거나 등 그가 열거하는 무수한 상황적 사례를 통해 청각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핀란드어를 처음 배우는 내가 현지인들의 대화나 발표를 들을 때 느끼는 상황과 흡사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도 핀란드어에 있어서만큼은 청각 장애인과 비슷한 면이 있었고, 곧 모든 이주민과 언어적 소수자들이 겪는 어려움에도 생각이 미쳤다.
 
Jukka의 발표에서 인상 깊었던 것이 또 있다. 그는 청각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지원하는 건축과 디자인, 그리고 기술 분야의 다양한 개선 사례를 소개했다. 한 건물은 홀의 천정 중앙을 돔형으로 설계해 한 쪽에서 말하는 소리가 천정을 거쳐 반대쪽까지 뚜렷하게 들리도록 설계됐다. 각종 세미나와 실내 강연에서 청각 장애인들에게 음파가 집중되어 전달되도록 고안된 휴대용 기술 장치도 인상적이었다. 행사 주관자가 007 가방 모양의 이 장치를 휴대해 행사장에 설치하면 되는 모양이다. 땀뻬레 시립도서관은 음악 홀 벽면에 특수 디자인된 기술 장치가 부착돼 공연의 음성(音聲)적 성격과 참가자들의 상황(장애 등)을 고려해 최적의 음향 조건을 제공한다고 했다.
 
놀라운 기술 혁신 사례들이었다. 핀란드 사회가 한 방향으로 오랜 시간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아이디어와 기술을 꾸준히 집적해온 결과로서 이러한 혁신과 실용적 해법들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발표에서 공통되게 환기되는 한 가지 포인트는 건축의 설계와 행사의 기획 시점에서부터 접근권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건물이 완공되거나 행사가 진행되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불편과 장벽, 이를 개선하기 위해 소요되는 추가적 비용과 시간 등을 사전에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건축가와 행사 기획자들이 관성적으로 일을 시작하지 않고, 혁신적이고 인권 친화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력하는 노력이 또 필요해진다.
 
3.
  
세미나가 끝나고, Kirsi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상념에 잠겼다. 장애인의 접근권이라는 의제는 이곳 핀란드에서도 현재 진행형의 도전인 듯 했다. 그러나 국가의 방치와 사회적 홀대 속에 소수 장애인 당사자들과 장애 단체의 강경 투쟁을 통한 사회적 문제제기가 하나의 공식 패턴처럼 진행되곤 하는 한국의 풍경과는 분명 다른 세상이었다. 어떤 의제이든 장기적인 안목 속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변화 방향과 진로 형성을 위한 실질적 대화와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세대, 두 세대 이상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협력해 나갈 때 비로소 전체적으로 고르고 높은 수준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지속적인 활동, 그리고 2007년 제정된 <장애인 차별금지와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그리고 2008년 유엔 <장애인 권리 협약>의 비준 등 최근 우리 사회는 장애인 인권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법적, 제도적 성취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제도적 성취의 이면에 실제 생활에서 장애인들이 겪어야 하는 인권 침해와 차별의 구조와 관행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다. 공적, 사적 삶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장벽은 매우 높은 수준이며, 장애인의 접근권과 평등한 참여권의 실현은 아직도 갈 길이 까마득하다.
 
특히, 정신병원이나 장애인 시설에서 장기간 격리 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의 인권 상황은 가장 심각하다. 지난 해 4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큰 이슈가 되었던 영화 <도가니>가 보여준 것처럼, 일부 장애인 교육 시설이나 생활시설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들은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장애인의 접근권 실현을 위해 핀란드는 물론 한국에서까지 왕성한 교류와 활동을 벌이고 있는 Kirsi의 노력이 지금 이 시점에서 새삼 소중하게 생각된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가시적인 공적 세계의 영역으로 동등하게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와 비장애인 시민들의 문화적 편견이 봄눈처럼 녹아내릴 수 있어야 한다. 교육과 예술, 문화적 접근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문화와 예술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정치적 화두인 복지국가의 건설 또한 이러한 인간적 노력과 섬세하게 연결된 과정이어야 한다.
 
 
4.
 
어제 핀란드의 장애 무용가 Risto Lång과 함께 헬싱키 공항을 떠난 Kirsi는 이미 한국에 도착해있을 것이다한국 친구들과 많은 교류를 해온 그녀는 한국의 음식과 문화도 무척 좋아한다. 그녀는 다음 주부터 11월 말까지 고양, 수원, 익산, 서울, 인천을 돌며 공연, 워크숍, 연극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할 계획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서울, 수원, 고양 주변에 사시는 분들은 한 번 시간 내어서 참여해보아도 좋겠다. 페북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2012. 10. 20.() 오후 7| 수원 에이블아트센터 콘서트홀 공연
* LÅNG ROMANCE
by. Risto Lång
연출Choreography: Minni Hirvonen
음악Music: Valtteri Kujala
프로듀서Producer/Manager: Kirsi Mustalahti
 
2012. 10. 24() - 25() 오후 8| 고양 아람누리 새라새극장
* 고양 장애인 문화 축제(The Cultural Festival of Disabled 2012)
 
2012. 11. 14() - 21()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 <리처드 3>(King Richard )
- 유라시아 셰익스피어극단
- 영어와 한국어로 진행되는 이 연극에서 Kirsi는 직접 배우로 출연한다.
 
 
 
 '장애인 접근권 세미나' - 휠체어 체험을 하고 있는 Kirsi와 다른 참석자들
 

'장애인 접근권 세미나'- 청취 가능 주파수 대역과 청각 장애인의 경우를 대비해 설명하는 Jukka


 장애인 접근권을 위한 ACCAC의 활동을 설명하는 Kirsi
(PPT 속 사진의 주인공이 Risto Lång. 한국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세미나가 열린 땀뻬레 시의회 본회의실 벽면의 부조물. 땀뻬레의 호수 풍경을 상징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