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0일 수요일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미래를 생각한다

북유럽 언론 모델을 찾아서 <1>
[기자협회보 글로벌리포트| 북유럽]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연구원

조지 오웰의 ‘1984년’이 출간된 것은 1949년이다. 당시 작가의 뇌리에 있었던 전체주의적 소비에트 체제들 대다수가 이미 몰락했다. 그러나 오늘날 첨단 정보화 기술 사회의 맥락을 타고 새로운 ‘빅 브라더’들이 출현할 가능성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 사태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세계 뉴스의 중심은 단연 에드워드 스노우든(Edward Snowden)이 ‘가디언’ 등에 폭로한 미국과 영국 정보기구들의 광범위한 불법 감시와 정보수집 문제였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두 사건은 아주 다른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지만 둘 다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난 6월 13일과 14일, 나는 핀란드 위바스뀔라(Jyväskylä) 대학에서 열린 ‘퀜틴 스키너 (Quentin Skinner)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오래 몸담아온 스키너는 서양 정치사상사 연구의 가장 탁월한 학자 중 한 명이자 위대한 현대 공화주의 정치철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핀란드 정치학자들과도 깊은 교류를 해왔는데 최근 핀란드 학술원 회원이 됐다. 심포지엄에서 스키너는 ‘자유의 계보학’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위 스노우든 사건에서 드러난 미국과 영국 정부의 행태와 태도를 강하게 비판한 뒤,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들의 사회는 지금 정말로 민주적인가?” “지금과 같은 자의적인 권력 행사와 지배의 조건 아래에서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운 시민인가?”

홉스로부터 시작된 전통적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는 ‘외적 간섭이 부재한 상태’를 자유로 정의한다. 그러나 스키너 등 현대 공화주의 정치철학자들은 자유는 물리적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자의적 지배의 부재’야말로 자유의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아무리 자비로운 주인이라 하더라도 자의적 권력 행사의 가능성이 있는 한 그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즉, 노예다. 스키너가 특히 우려한 것은 노예가 주인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기제로서 작동하는 자발적 복종, 곧 ‘자기검열’의 가능성이다. 정보 기술 체계의 급속한 발달과 정치-시민사회의 무기력을 상기하며 그는 현대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의 앞날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해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현실의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지배 추세를 막고, 진정한 차원의 시민적 자유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위 사건들의 경우 철저한 진상 조사와 공개, 책임자 처벌과 정책 전환, 제도적 재발방지 장치 마련 등이 일차로 요구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더욱 절실히 희구되는 것은 민주적 가치와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강력히 헌신해온 언론의 존재와 활동이다. 스노우든 사건에서 ‘가디언’이 수행한 역할과 국정원 사태를 왜곡, 은폐하는 데 사실상 동조해온 한국의 주류 언론들을 비교해보라.

물론 한국 언론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5년의 반민주적 퇴행에 더해 최근 일부 종편 채널의 5·18 역사 왜곡, KBS, MBC, YTN 등 주요 방송사들의 자체검열이나 국정원 개입 의혹, 한국일보 사주의 전횡과 노조 탄압 등 한국의 언론 상황은 총체적 위기에 가깝다. 언론의 자유도, 공공성도 모두 고사 직전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더불어 민주주의도, 시민적 자유도, 정치공동체의 미래도 좌표를 잃은 채 떠내려간다.

앞으로 이 지면을 빌려 북유럽의 미디어 시스템과 저널리즘의 특징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하려 한다. 신문 발행부수와 구독률, 미디어 다양성, 방송 공공성, 직업 전문성, 언론 자유 등의 지표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북유럽 언론의 현황과 도전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2013년, 참담한 한국의 언론 현실을 넘어서는 비판과 성찰, 상상과 재구성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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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3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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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서 소개한 퀜틴 스키너 교수의 강연 사진을 첨부합니다. 이틀 내내 그의 바로 옆자리에서 세미나를 참관하며 몇 차례 그와 대화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빽빽한 일정 속에 많은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는데, 반듯한 자세로 앉아 끊임없이 경청하고 메모하며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스키너 교수의 자세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모국어(영어)로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잘 안다는 말로 항상 인사말을 시작하는 그는, 모든 연구자들의 발표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내고, 고유한 장점을 격려하며, 때로는 후학들을 위해 고백에 가까운 자기성찰적 이야기들까지 기꺼이 들려주더군요. 학문적 공론장에서도 시민적 자유를 실천하려 노력해온 진정한 현대 공화주의자의 면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최근 한국에도 퀜틴 스키너의 책들이 여러 권 번역, 소개돼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독서와 토론을 권합니다.
 
아울러 위 심포지움 참석차 방문한 위바스뀔라 대학과 도시의 풍경 사진도 몇 장 올립니다. 큰 호수를 면해 지어진 위사스뀔라 대학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150년 역사를 가진 이 대학에서 핀란드의 근대 교육학이 태동했는데, 지금도 대학의 학풍과 문화가 훌륭하다고 많은 참석자들이 말해 주었습니다. 
 
참고로 맨 마지막 사진이 "핀란드 초등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Uno Cygnaeus(1810-1888)의 흉상입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핀란드는 세계 최초로 초등교육 과정에 수공예 교육(käsityönopetus, handcraft education)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위바스뀔라 대학은 그가 설립한 <핀란드 교사 세미나>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교사교육학과로 유명합니다.
 
그 밖에 조용한 토요일 아침의 시내 거리와 오래된 기차역 건물 등을 몇 장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히 나시길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