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3일 수요일

예비학교와 축구 클럽: 선재의 새로운 시작

오늘 선재의 예비학교(pre-school)인 끼싼마 초등학교(Kissanmaan Koulu)에 다녀왔다. 예비학교란 핀란드와 스웨덴 교육 시스템의 한 특징으로, 유치원을 마친 6세(한국 나이 7세) 아이들이 1년간 미리 초등학교 생활을 경험하고 준비하도록 배려한 중간 과정의 교육제도를 말한다. 비용은 무료이며, 지방자치단체가 제도 운영을 책임진다. 의무교육이 아니라 부모가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이지만, 6세 어린이의 약 96%가 예비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유치원 일부에 예비학교 반을 두기도 하고, 초등학교에 두기도 한다.

'혹시 예비학교라니 한국처럼 선행학습을 시키는 건가?'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예비학교에서 교과목 수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직 겪어보진 못했지만, 예비학교 단계에서도 아이들은 유치원에서처럼 주로 친구들과 뛰어놀고 음악, 미술, 스포츠, 수공예, 그리고 극장.박물관.미술관 견학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고,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의사소통하는 기술을 익힌다. 같은 예비학교의 아이들이 대부분 같은 초등학교로 진학하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의 초기 적응과 지속적인 교우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오늘 모임은 한국 같으면 학교 예비소집 정도 되는 듯 한데,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교실에 가득 모여있었다. 지난 초봄에 한 번 찾아가 면담을 했던 일마린 어린이집(Ilmarin Päiväkotti)의 온화한 교장 선생님과 네 명의 선생님들이 우리를 맞았다. 좋아라, 앞장서서 걸었던 선재는 막상 선생님들 앞에 서자 긴장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외면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래도 아빠, 엄마가 선생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선생님들이 자기 이름을 말한 뒤 손을 내밀며 선재 이름을 묻자 훌륭한 핀란드어 발음(!)으로 "Minun nimi on Sunjae.(제 이름은 선재입니다.)"라고 대답하더니, "Hauska Tutustua!(만나서 반갑습니다.)"까지 말해 선생님들의 즐거운 탄성을 자아냈다!^^

교실에 앉아 교장 선생님에게서 핀란드어로 학교 소개를 받고, 입학 등록 원서를 써서 제출했다. 20여 명의 아이들이 두 반으로 나뉘어 생활할 예정이고, 선재는 A반에 속했다. 친구들 중에는 요즘 선재가 다니는 축구 클럽의 한 아이가 눈에 띄어 그 부모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한 분이 친절하게 영어로 안내해주어 원서 작성을 수월하게 마치고, 다른 교실 한 군데를 둘러본 뒤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아이들은 긴 방학 후에 8월 13일부터 1년 간의 예비학교 과정을 다니게 된다.


선재는 지난 1월부터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 유치원을 다녔는데, 지난 5월 31일 한 학기 과정을 잘 수료했다. 계속 국제 유치원과 학교를 다닐 것인지, 핀란드 교육과정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고민했는데, 우리는 장기적인 고려 속에 당장은 언어적 어려움이 크더라도 핀란드 교육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행히 선재가 지난 한 학기동안 영어 유치원을 다닌 것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우리 부부야말로 핀란드어를 빨리 익히도록 박차를 가해야 할 듯 하다.

짧은 예비소집이 끝나고, 우리는 학교를 나와 인근 공원의 축구장으로 향했다. 선재는 방학이 시작된 지난 주부터 유소년 축구 클럽(월, 수)과 달리기 프로그램(화, 목)에 참가하고 있다. 4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는 축구는 75유로, 방학에 5주간 진행되는 달리기는 35유로의 비용을 내는데, 같은 연령대의 다양한 핀란드 친구들과 만나는 데다 몸으로 실컷 뛰어놀 수 있으니 전혀 비용이 아깝지 않다. 지난 주에 축구화와 축구공, 축구 양말, 정강이 보호대 등을 산 데다 이번 주에는 멋진 축구 유니폼까지 받아서 선재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모습이다. 오늘은 땀페레 다른 지역의 클럽 팀이 원정을 와서 시합을 벌였는데, 공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우루루 공을 놓고 뛰어다니는 것이 얼마나 어여쁘고 재미있던지...ㅎㅎ

선재는 아직 경기를 보는 눈이나 공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래도 신이 나서 열심히 뛰어나녔다. 시합이 끝나자 달려와서는 "아빠, 나 오늘 골은 못 넣었지만 대단했지?"라며 즐거워한다. 아직도 에너지가 남은 선재를 데리고 공원 잔디밭에서 둘이 한참을 더 축구를 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었다.

그럼, 오늘 선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래 동영상을 한 번 보시라~^^




2012년 6월 1일 금요일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3)

4.
 
민주화 이후 25, 그러나 세금도, 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의 바깥에서 얼굴없이 살아가는봉제공장의 영세사업주에게, 기업주는 물론이고 정규직 노조마저 적대하고 외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게으른 복지수급자로 낙인찍히거나 복지서비스의 사각지대에서 끝없는 불행을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빈곤층 서민들에게, 이윤 추구만을 앞세우는 대기업의 권세와 횡포 앞에서 순식간에 생존권을 위협받는 재래시장의 상인들에게, 이른 새벽 찬 공기만 마시다 발길을 돌려야 하는 인력시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국가의 체계적인 농업 포기 정책 속에서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촌 주민과 농민들에게,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전부터 비정규 노동과 반실업 상태로 내몰리며 미래를 꿈꿀 권리마저 부정당하는 젊은 세대에게,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상에서 상시 인권침해 가능성에 노출돼있는 이주노동자에게, ‘대출 권하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강요한 신용불량의 딱지와 그 트라우마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300만 명의 인구에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최장집 선생의 칼럼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향한 그의 고뇌에 찬 음성을 듣는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왜 우리의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은 실제적인 시민들의 삶의 현장을 찾지 않는가? 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애로와 호소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왜 이들의 이해관계와 의견을 정치적 공론장으로 이끌어내고, 관련 당사자들과 그 대표들을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려 하지 않는가? 왜 현장으로부터 정책을 도출하지 않는가? 정당들은, 특히 진보정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기본적인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은 채 제도로서 의회와 정당의 총체적 위기와 쇠퇴를 말하며 이들의 기능을 서둘러 폐기처분하려는 조급한 경향이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를 최장집 선생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와 제도권 정당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아직 제대로 된 정치적 대표 시스템과 정당 정치조차 갖고 있지 못한 미발전의 민주주의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신생 민주주의와 의회-정당은 이미 100, 200년의 역사적 성장과 완숙기를 지난 뒤 새로운 도전에 직면에 후퇴 혹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서구의 그것과 결코 동일한 상태가 아니다.
 
 
물론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작동하는 만큼, 수많은 새로운 도전과 위기를 우리도 함께 공유한다. 자본주의 지구화와 탈산업사회적 정보화 시대의 도래, 전지구적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녹색 정치의 도전, 인권·평화·젠더·생태 등 새로운 사회적 의제의 확산과 질적 민주주의의 요구, 국제이민의 증가와 다문화사회로의 전환, 더 많은 자치와 참여를 요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 확대 등. 이 모든 새로운 도전들은 근대 시민혁명과 주권적 국민국가, 산업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기초해 성립된 현대 대의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에 중대한 변화의 압력을 불어넣고 있다. 2008년의 촛불집회와 최근의 나꼼수 현상처럼 우리 사회에서 더욱 빠르게 실험되고 확산되는 정치문화적 현상도 분명히 감지된다. 더욱이,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역학의 변동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의 평화적 질서 구축과 남북한의 미래지향적 통일을 향해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의 탁월한 정치적 지혜와 실천이성을 요구하고 있다.
 
나도 이러한 진단에 동의한다. 안정기를 지난 근대 민주주의가 처한 다층적 위기와 질적인 전환 양상을 살펴보고, 대안적 정치 질서 경희대 김상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미지의 민주주의’ (김상준, 미지의 민주주의, 2011, 아카넷) 의 내용과 형식을 탐색하는 것은 나에게도 핵심 관심사이며, 내가 지금 핀란드까지 와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된 중요한 동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는 그들 사회에서 여전히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 집단적 이해관계 및 의견의 형성 및 대표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한 사회적 갈등 및 문제 해결 과정의 핵심적 제도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많은 진보적 학자들과 시민들이 바람직한 모델로 상정하는 북유럽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들도 잘 들여다보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의회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가 시민들의 삶에 깊이 밀착되어 운영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이들은 입법과 정책 형성 과정에서 관련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객관적이고 철저한 연구 조사, 그리고 모든 이해당사자 그룹들의 의견 수렴과 넓은 참여를 바탕으로 대안적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합의적 의사결정 모델을 발전시켜왔다. 이들 국가가 높은 정치적 대표성과 민주적 책임성을 구현하고, 나아가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신뢰를 유지해온 비결이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화두인 참여 민주주의와 숙의(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도 근대적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와 완전히 새로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를 관계론적, 시민사회론적 지평에서 재해석하고 급진적으로 보완하는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한 세기 동안의 고투 끝에 도달한 한 지점으로서 현 단계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그 내실을 다져가는 가운데, 새로운 도전과 위기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5.
 
지난 5월초에 한국에서 핀란드를 찾아온 한림대 김순영 박사와 대화하다 그이가 우리 사회에서 드물게 신용불량자 문제를 천착해 책까지 출간한 전문가이며(김순영, 대출 권하는 사회, 2011, 후마니타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부터 오랫동안 최장집 교수를 도와 일해 온 것을 알게 됐다. 실제로 신용불량자를 주제로 한 이번 두 차례의 칼럼에서는 그이의 연구와 조언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지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때 김순영 박사와 대화하던 중 최장집 선생이 이 칼럼 쓰는 일이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두려 한다는 말씀을 전해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지금 선생이 쓰시는 이 칼럼은 정말 훌륭하고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작업이니 부디 힘을 아끼셔서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해주시길 바란다는 독자로서의 소감을 전했다.
 
그러나 고령의 선생이 이 칼럼을 언제까지 쓰실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부디 오랫동안 경향신문에서 그의 칼럼을 볼 수 있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함께 읽고, 우리 정치가 대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글에서 자신의 존재이유와 존재방식을 발견하는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특히 경직된 이데올로기와 추상적인 거대담론 속에서 구체적 현실을 외면한 채 낡고 좁은 골방에 갇혀있는 진보정치세력이 진정한 혁신의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설령 선생이 칼럼을 조만간 그만 쓸 수밖에 없더라도, 그와 같은 정신과 자세로 단련된 많은 시민들이 제대로 된 정치평론과 정책입안, 나아가 책임있는 정치적 대표로서의 활동을 더욱 왕성하게 전개해가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끝)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 (2)

 
3.
선생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을 따라 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그의 통찰에 귀 기울여 보자. 첫 칼럼이었던 장위동 봉제공장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이렇게 진단한다.

봉제 산업이 적지 않은 고용을 흡수하고 도시 서민가구의 소득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에도, 이 부문의 기업주-노동자들은 정부의 공식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세금도 없고, 보험도 없이 공적 제도 밖에 존재하는 얼굴 없는 사회경제적인 집단이다......(중략) 봉제 공장이 밀집한 이 지역에서 정당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뷰에서도 그들은 선거철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에 정치인들이 공장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정당과 정치인들도 이들과 의사소통이나 접촉을 시도하지 않는다. 전국적인 정당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지역구의 정치인 차원에서도 지역구 내에 있는 이들 사회경제적 인구 집단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은, 정치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 정당의 사회적 기반 없이 민주정치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2011.8.22. 경향신문)

아동복을 제작하는 한 봉제공장 내부 전경(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또 새벽 4, 가을 공기가 차가운 성남의 인력시장을 찾아 전국적으로 57만 명에 달하는 일용직 노동자들 몇 사람을 인터뷰한 뒤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이들에게서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나? 나는 새벽의 인력시장에서 정치와 정당 일반의 부재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진보정당의 부재 역시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그리고 여러 운동 단체에서 내세웠던 화려하고 추상적인 진보적 구호들과 담론들이 이 현장에서는 아무 흔적도 갖지 못했다. 이들 노동자들의 존재를 의식한 산업-고용정책, 외국인 노동자정책, 주택정책, 교육정책은 없었다.”(2011.9.26. 경향신문)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감을 기다리는 일용직 노동자들(출처: 구글 이미지)
 

그의 발길을 계속 따라가 본다. 이마트가 들어선 뒤 급격한 매출감소로 위기에 빠진 공덕동 재래시장을 방문해 상인들과 대화한 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의 핵심은, 대기업의 과도한 영향력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 이들에 의해 변형된 국가 관료제와 여론매체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대기업의 독점적 영향력으로 인해 파괴된 시장경쟁과 효율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소기업과 소매업체들의 경제적 활력을 복원시키는 일은 단순한 온정적 조치가 아니라 한국경제와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문제라는 것이다. 총선,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 모두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중소기업과 소자영업자, 노동자와 같은 이해당사자들의 참여와 대표의 문제는 말하지 않는다. 이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자율적 결사체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 없이, 대기업·정부관료·주류언론의 유착을 제어할 수 있을까? 사회적 힘의 관계를 더 넓게 다원화하는 작업 없이, 정당들이나 정치인들이 무정형의 여론매체 위를 둥둥 떠다니며 공허한 개혁 언술을 남발하는 것으로 과연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2012.1.30. 경향신문)
재래시장과 대형마트(출처: 오마이뉴스)
  

황폐해진 농민, 농업 문제를 고민하며 농민운동 활동가들을 만난 뒤의 칼럼에서는 아래와 같은 질문이 빛난다. 좋은 질문은 그 속에 이미 좋은 해답의 실마리를 품고 있는 듯하다.

농촌이 이토록 피폐화된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 수 있을까? 농업의 붕괴 위에서 산업 발전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농촌의 피폐와 농업의 붕괴는 방치되어 왔을까? 농민들의 요구와 불만은 왜 정책으로 수용되지 못했을까? 농민이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어 조직화되기 어렵다는 점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정당체제가 노동자나 농민, 중소기업, 자영업자와 같은 생산자 집단들의 이익을 두고 경쟁하기보다 폐쇄적인 지역갈등 구도에 얽매어 있었다는 데 기인하는 바 크다. 지난 10년 동안만 해도 농업인구가 22%나 급감해 이제는 겨우 300만 명밖에 안 되는 열세 집단이 되었다는 점도 정당들이 그들에게 다가갈 유인을 줄이고 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단절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농업·농민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대 문제로 다시 논의될 수 있게 될까?”(2012.2.27. 경향신문)
 

비정규직 청년 노동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청년유니온을 찾은 그의 칼럼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 명의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의 이력과 노동 조건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다.

총선을 앞둔 지금, 필자는 두 가지 의문을 갖는다. 하나는 복지나 재벌개혁과는 달리 비정규직 문제는 왜 중대 쟁점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젊은 세대의 노동문제는 누가 대표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최근 나는 하급 서비스직 부문에서 시급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청년유니온조합원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종필씨는 피자 배달 일을 했다. 유사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임금은 높았지만 오토바이 사고 위험이 컸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청년유니온 1기 조직팀장을 지냈다. 서유란씨는 해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네일아트 기술을 배울 학원비를 충당하고자 대형마트 안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일을 하는 시급 노동자였다. 이번에 청년유니온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수민씨는 신용정보사의 정규직 직원이다. 120~130만원의 급여로는 부족해 퇴근 후 집근처 커피가게에서 일주일에 4, 저녁 8시에서 새벽 1시까지 월 40~45만원의 추가 수입을 위해 일을 한다. 현재 청년유니온 홍보팀장이다. 대학 재학 시절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청년유니온 창설에 참여했던 김형근씨는 24시간 편의점에서 주 3일 밤 11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야간근무를 했다. 현재 청년유니온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듣는 청년유니온 이야기는, 내게는 무척 생소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2012.3.26. 경향신문)
최저임금 인상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출처: 청년유니온)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놓인 이주노동자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주노동자와 고용주, 지원단체 등에 대한 현장 취재를 두루 마친 뒤 그는 문제와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실질적인 정책-제도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뭐든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직설 속에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복지체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부가 할 일이다. 외국인노동자도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사관계가 개선돼야 한다. 그것은 사용자단체와 노조가 나설 일이다. 외국인노동자 보호입법도 필요하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피해서는 안된다. 어느 나라든 외국인노동자 유입을 개방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일정한 제한이 없을 수 없겠지만, 고용주의 신원보증을 통해 고용허가를 연장해주는 제도를 도입할 수는 있다. 이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은, 외국인노동자 청원을 전담 처리하는 지역노동위원회나 노동법원을 설치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서비스부문이나 3D업종에서는 외국인노동자의 공급을 더 원하는 반면, 건설업에서는 내국인노동자의 고용기회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업종별 고용쿼터제를 두거나 노조와 사용자단체 간의 협의를 통해 풀어갈 수 있다. 뭐든 안 되는 것은 없다. 외국인노동자의 합법화를 위한 제도개선은 중요하다. 이 문제가 정책적 필요에서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도덕적 책임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2012.4.23. 경향신문)
 

2회에 걸쳐 전국적으로 300만에 달하는 신용불량자 문제를 깊이있게 파헤친 최근 칼럼에서는 최근 심각한 전사회적 이슈가 돼온 통합진보당 사태와 연관지어 이렇게 결론내린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신용불량자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잘못된 이념적 급진주의에 의해 주도된 진보정치가 민중의 권익 증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민주주의 그 자체에 해악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보고 있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이 신용불량자 문제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첫째는, 신용불량자 문제를 포함하여 금융정책을 실제로 다룰 수 있는 당의 제도와 조직체계를 조직하는 일이다. 이는 관련 이해당사자 집단, 예컨대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 복지수혜 대상자, 청년 등이 정책 이슈 제기에서 아젠다 형성, 정책 대안 마련에 이르기까지 보다 더 가까이 참여하거나 접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당 활동의 체계가 달라지는 문제를 말한다. 당의 조직과 역할은 시민의 실생활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업에 부응할 수 있도록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고서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실제 사태를 못 보게 만드는 역기능이 될 수 있다.(후략)”(2012.5.18. 경향신문)

한림대 김순영 박사가 신용불량자 문제를 파헤친 책 <대출 권하는 사회>의 표지 사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