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일 수요일

핀란드 국가인권행동계획 세미나 참관기

[2014. 4. 2. 기자협회보 칼럼]

3월의 마지막 날, 핀란드 법무부와 의회 인권센터, 내가 유학 중인 땀뻬레(Tampere) 대학교가 공동 주최한 인권 세미나에 참석차 헬싱키에 있는 의회를 다녀왔다.

세미나에서는 2012년 4월, 현 정부가 채택한 핀란드의 첫 국가인권행동계획(2012~2013)에 관한 평가보고서가 발표됐다. 땀뻬레대 공법학과 연구팀이 작성한 평가보고서는 행동계획이 핀란드의 국가 인권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특히 정부와 시민사회가 협력해 국가인권정책을 발전시킨 점을 높이 평가했다. 보고서는 아울러 1차 행동계획에 인권정책의 우선순위가 명시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면서 정부 프로그램 및 예산과 면밀하게 연계된 행동계획의 수립을 제안했다. 나아가, 다소 산재돼 있고 자원이 불충분한 국가인권체계를 강화할 필요성도 제시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한국도 2007년부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이 수립, 시행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핀란드의 인권정책 논의가 반드시 빠르고 앞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 우리의 경우처럼 구조적 인권 침해와 차별적 실태가 만연한 현실에서 형식적 정책 체계의 수립 자체가 인권의 실현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세미나는 내게 핀란드에서 인권 정책과 담론이 발전해온 역사적 과정을 짚어볼 수 있게 했다.

사실 핀란드에서도 인권 정책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현상이다. 물론 북유럽 국가로서 핀란드에도 사민주의적 평등과 연대, 시민적 자유의 전통이 시민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러나 냉전 시기 핀란드는 소련의 간섭과 제약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교적 중립정책을 고수했고, 이는 국제인권 이슈에도 적용됐다. 1975년의 헬싱키 평화협약은 동서 갈등에 끼인 핀란드의 지정학적 곤란을 역으로 활용해 적극적 국제외교 전략을 구사한 결과였다.

핀란드가 국제인권 레짐에 본격 합류한 것은 1990년대다. 소련의 붕괴로 핀란드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와 유럽인권협약(ECHR)에 가입할 수 있었고, 나아가 1995년부터 EU 회원국이 됐다. 같은 해 핀란드는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유럽인권협약에 맞춰 전면 개정했고, 그 연장에서 2000년 헌법의 전면 개정을 단행했다. 이 시기 핀란드는 EU 의장국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국제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인권, 양성평등, 국제원조, 평화중재 등의 의제를 선도하며 인권 국가로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여전히 외무부의 외교 전략의 일부처럼 인식되던 인권 의제가 핀란드 정부의 정책 형성에 중심 이슈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이후다. 2002년부터 학교 교육에서 인권교육이 대폭 강화됐고, 2007년부터 정부 프로그램의 주목표로 인권실현의 촉진이 포함됐다. 2011년 임기를 시작한 현 정부는 국가인권행동계획을 채택하기로 의회에 보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권은 핀란드 정책형성 회로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공간 이동했다.

이번 세미나에는 핀란드의 전 대통령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과 전 의회 옴부즈맨 리따-레나 빠우니오(Riitta-Leena Paunio), 의회 헌법위원장 요한네스 꼬스끼넨(Johannnes Koskinen)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특히, 인상적인 사람은 할로넨 대통령이었다. 비서도 없이 소박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단순한 축사가 아니라 풍부한 경륜에 바탕한 구체적 논평을 제공했다. 국가 권력과 시민 간의 관계가 수평적이고 가까운 북유럽 민주주의의 한 단면이다.

할로넨 대통령의 이력도 참 흥미롭다. 헬싱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할로넨은 학생운동을 거쳐 1971년 사민당에 가입했고, 1970년부터 핀란드 노총(SAK)의 변호사로 일했다. 70년대 후반 헬싱키 시의회와 핀란드 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1980~81년에는 핀란드 동성애 단체(SETA)의 대표를 역임했다. 보건복지장관(1987~90), 법무장관(1990~91), 외무장관(1995~2000)으로 활약한 뒤 2000년 핀란드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돼 2012년까지 연임하며 인권 외교와 성평등에 앞장섰다.

높은 대중적 지지와 국제적 명성을 누렸던 그녀는 퇴임 후에도 인권, 민주주의, 시민사회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녀의 인생 역정에서도 우리는 핀란드의 인권 정책과 문화가 발전해온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1부 세미나에서  평가보고서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있는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 대통령.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의회와 내각의 요직을 거쳐 대통령까지 지낸 그녀는 현대 핀란드의 양성평등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지금도 대중적 인기가 높다. 2002년과 2006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고(故)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회담한 일이 있다.

2부 세미나의 패널 토론. 의회 헌법위원장 요한네스 꼬스끼넨과 의회 인권센터 소장 끄리스띠나 꼬우로스(Kristiina Kouros) 등이 앉아 있다. 사회자는 내가 속한 땀뻬레대 정치학과의 전임 강사 따르야 세빠(Tarja Seppä)로 국제인권 전문가이다.

의회 인권센터 소장 끄리스띠나 꼬우로스(Kristiina Kouros)가 인권 정책과 담론의 다양한 층위와 실현 양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에는 국가인권기구가 의회 옴부즈맨 산하의 인권센터 형태로 설치돼 있다. 시민들의 진정에 대한 조사와 구제는 옴부즈맨이 직접 담당하고, 인권센터는 주로 인권 정책, 연구, 교육, 협력 기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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