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31일 목요일

[최장집 칼럼]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1)

  
1.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최고의 동료로 만나 지금은 10년의 나이 터울에도 불구하고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형제처럼 지내는 백선익 선생님. 어쩌다 나는 지금 핀란드에서, 백 선생님은 필리핀에서 각각 떨어져 유학하는 처지가 되었다. 곧 필리핀국립대학 아시아학 석사과정 입학을 앞두고 있는 선생님과 종종 통화하는 것이 내게는 큰 위로와 용기가 된다. 그런데 지난 4월 초순 경 어느 날 아침에 백 선생님과 인터넷 전화로 통화하다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며 동의한 일이 하나 있다. 바로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최장집 칼럼]이 정말 훌륭하다는 것!
 
그 때 우리는 총선을 앞둔 한국의 정치적 풍경(특히야구의 무사만루 찬스에서 병살타를 친 뒤 투아웃 상태의 위기에 빠진 모습에 비유되던 민주당 한명숙호의 무기력과 이른바 김용민 막말 파문 논쟁)에 대해 우울한 소회를 나누고 있었는데, 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백 선생님이 그래도 요즘 최장집 선생 칼럼이 참 좋데.”하고 운을 떼는 것이었다. 나도 재빨리 그 말을 받아, “, 그렇지요! 그렇지 않아도 최근 최장집 선생 칼럼을 읽고 너무 좋아 그 동안 연재된 칼럼을 한 달음에 모두 읽었어요!”라고 목청을 높였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내가 저 두 사람 또 의기투합 하는구나’, 그런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계속 소리를 높이며 최장집 선생 글의 미덕을 부르짖었다.
 
그 뒤에도 지금까지 격주 정도에 한 번 꼴로 연재되는 이 칼럼을 나는 모두 열독했다. 내가 보기에 최장집 선생의 이번 칼럼 연재는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여러 측면의 성취와 모멘텀을 제공한다선생의 칼럼을 읽으며 갖게 된 여러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2.
우선, 선생의 칼럼들은 그 자체로 뛰어난 정치평론이자 사회비평이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제도화된 정당 정치의 성숙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연구에 오랜 동안 천착해왔던 정치학자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적, 실천적 지향은 칼럼의 선명한 지향성으로 일관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이 작업을 추상적인 이론적 명제와 주장으로 전개하는 대신, 우리 사회의 가장 실질적인 문제이면서도 정치적 공공 영역에서 거의 대표되지 않는 이슈들을 통해 아주 구체성있게 풀어간다.
 
장위동 봉제공장의 얼굴없는 생산자들로부터 시작해,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감춰진 상처”, “현대차와 민주적 노사관계”, “다시, 변화의 중심에 선 젊은 세대”, “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복지를 생각하다”, “공덕동 재래시장에서”, “농업·농민을 다시 생각한다”, “‘청년 유니온한국 노동운동의 희망”, “외국인 노동자,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그리고 최근의 누가 신용불량자를 만드나누가 신용불량자를 방치하나에 이르기까지, 제목만 일별해보아도 그의 관심이 향하고 있는 장소가 어딘지 생생히 전달된다.
 
더욱이, 이 칼럼들을 그는 책상에서 쓰지 않고 현장을 발로 누비며 썼다. 칼럼이라기보다 심층 르포에 가까운 한 편 한 편의 글에는 현장에서 그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육성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어느덧 정년을 지나 칠순이 다 된 원로 정치학자가 전국의 현장을 누비며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그러나 정말 실제적인 문제들을 면밀히 취재하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시민권을 얻지 못한 우리 시대의 민중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그려내는 이 수고로운 작업 앞에서 나는 깜짝 놀랐고,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칼럼들은 비단 뛰어난 정치평론의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 매 편의 글이 사안의 정곡을 찌르면서, 특히 민주화된 정부-의회와 정당과 정치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며, 지금껏 무엇을 하지 않고 있는가를 정확히 지적한다. 좋은 정치평론은, 그러므로, 좋은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와 실천(praxis)의 차원으로 연결된다. 그의 글들은 현재 한국의 민주적 의사결정 제도와 그 중심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걸고 치열하게 수행해야 할 기본적 임무와 역할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는 10년의 집권 경험을 지니고 있으면서 현재 야권을 대표하는 민주당을 비켜가지 않으며, 나아가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반성의 촉구로 이어진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는 [최장집 칼럼]




(계속)

2012년 5월 28일 월요일

기쁜 소식

방금 지도교수를 만나고 왔다. 북유럽 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최근 이슈를 개관하는 논문 챕터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 조언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아주 잘 정리됐고, 몇 가지 보완하면 좋은 글이 되겠다는 격려에 고무된다. 유월 중에 보완 작업을 하기로 했고, 다음 학기에는 논문의 이론적 틀과 방법론을 정교화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첫 학기를 알차게 마무리할 수 있을 듯..

그리고 정말 기쁜 소식! 이번 가을학기부터 2016년 여름까지 4년간 장학금을 받게 됐다. 지도교수가 핀란드 학술재단(Academy of Finland)에 제출한 연구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나도 연구원으로 '고용'되게 된 것. 프로젝트 이름은 "Parliaments, Citizens, and Democracy in the Nordic Countries".  나의 박사논문도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이로써 그 동안 살얼음을 걷는 듯 했던 재정 상황에서 벗어나게 됐다. 재정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비자, 의료, 교육, 그리고 나의 연구실 등 많은 현실적 문제들이 풀리게 됐다.  감사하다. 그동안 응원해준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경험하고, 생활해야겠다고 다짐한다..

2012년 5월 18일 금요일

80년 광주의 기억과 2012년, 세계의 ‘5.18들’

1.
5월이구나. 5.18, 빛고을 광주의 상처와 기억의 힘. 그 속에 87년의 뜨거운 여름이 잉태돼 있었지. 그러나 그 날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 거꾸로 가는가? 많은 사람들이 꿈꾸었던 민주주의도, 인권도, 평화도, 공동체도 지금 위태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위기를 타개할 진짜 희망과 대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의 고뇌를 더 깊게 하는 요즘 세월이다.
 
2.
작년부터 이어진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의 시민혁명들, 그리고 시리아 사태.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리아 민중들의 항의와 이들에 대한 알 아샤드 대통령의 거리낌없는 무력 공격을 보면서 나는 19805, 우리의 광주가 겪었을 두려움과 분노, 고립과 희생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석유 자원을 소유한 리비아 내전에 대한 NATO의 공습이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면서, 정작 시리아 사태는 수많은 인명 피해와 반인도주의적 범죄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즉각적 주목을 받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은 뒤늦게 UN 안보리를 통해 시리아 제재안을 추진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에 부딪쳐 표류했다. 뒤늦게 안보리 제재안이 통과되고, UN 전 사무총장 코피 아난을 특사로 한 UN의 평화 중재 노력이 전개되고 있지만(핀란드도 UN의 시리아 평화유지단에 전문 인력들을 파견시켰다), 그 동안 시리아의 상황은 너무 많이 악화돼 있다고 한다.
 
3.
지금 아랍의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시민혁명 이후의 이집트 상황에서 보듯이 민주화 이후에도 이들이 걸어야 할 숱한 가시밭길과 정치적 혼란, 시행착오와 미숙함의 여정은 우리의 경험을 반추해볼 때 충분히 자명한 사실로 예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우리들이 세계시민으로서 무언가 함께 연대하고 손 내밀 수는 없을까? , 지금 급진적인 변화와 개혁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분열과 갈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경험으로부터 어느덧 만족한 중간계급의 민주주의 상태에 정신적으로 안주해온 듯한 우리 사회가 다시 배우고 성찰할 점은 없을까? 이와 같은 일이 반드시 국제연대를 전문으로 하는 시민단체나 몇몇 인권 활동가들만이 고민해야 하는 영역일까?
 
광주와 5.18을 아프게 기념하면서도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5.18'을 아직도 먼 나라의 일로만 여기고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우리들. 그리고, 터질 듯 비좁은 한반도의 남쪽 구석에 웅크린 채 당권파니 비당권파니, 부정선거니 부실선거니, 당비대위니 당원비대위니 다퉈야 하는 처지의 진보정당.
 
이것이 어쩌면 오늘날 세계화되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의 한 자화상이 아닐까? 사실 시리아 사태의 평화적 중재와 해결 노력을 최종 책임지고 있는 반기문 UN 사무총장마저도 외교관료적 수사와 형식적인 유감 논평을 뛰어넘는,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신장을 향한 신념있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적은 없는 것 같다.
 
4.
이렇게 세상이 굴러간다는 것에 대해 솔직히 자괴감을 느낄 때가 많다. 한국 사회의 표면적인 성장과 뭉뚱그려진 지표상의 성취들 이면에 우리 사회 내면의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또 누가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참으로 어렵고, 그래서 종종 괴롭기까지 하다.
 
현 집권세력과 재벌, 보수언론, 대형교회, 사학재단 등 '뼛속까지' 사익 추구 정신과 왜곡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듯한 한국의 보수 지배세력에게서 그러한 변화와 개혁의 리더십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보를 자처하는 정당마저 민주적 선거 절차를 '관행적'으로 위반하고, 집단적 폭력을 통한 문제해결을 정당화하며, 자신들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오직 '당원 동지들'이라고 강변할 때, 그럴 때 여전히 대한민국의 민주적 변화와 진보적 공동체를 꿈꾸는 시민들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한국엔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진보도 아직 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는 우리가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가깝도록 제대로 된 정치적 선택지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니,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과연, 안철수 현상이 달리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5.
이제는 정말 형식과 관성을 넘어, 우리가 표방해온 막연한 가치와 이상들에 대해 나의 몸과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하나하나 되묻고 재구성해가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크고 작은 정치적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제시되는 영혼없는논리와 자기기만적 정당화를 중단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오늘의 세계를 넓고 깊게 통찰하고, 새로운 사고와 정치적 상상력, 창조적 문제해결능력을 함께 길러가며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평화적인 대한민국, 그리고 동아시아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해야 할 때이다.
 
이번 12월의 대선에서는 진보든, 보수든, 중도든, 정치적 비전과 가치, 정강과 정책, 조직문화와 감수성 모든 면에서 ....” 제대로 내실을 갖춘 정치세력이 승리하고, 이를 통해 향후 한국 사회의 담대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배출되기를 희망한다.

2012년 5월 15일 화요일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하다: 풍경과 단상

2012년 5월 15일 오전 10시, 드디어 프랑스 사회당의 올랑드(Hollande)가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뉴스. 엘리제 궁에서 사르코지 부부를 배웅하고 헌법 준수 서약을 한 뒤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다. 이로써 프랑스에서는 17년만에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다.

취임 연설에서 올랑드는 재정 적자, 저성장, 높은 실업률, 유럽 재정 위기 등 프랑스가 당면한 험난한 도전들을 직시하며, 모든 역량을 동원해 대응해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성장 전략을 통해 유럽연합의 '새로운 길'(new path)을 열겠다고 강조했다. 또, 공정하고 정의로운 프랑스, 사회적 연대의 가치와 문화, 품위있고 양심적인 리더십을 구현하겠다고 말했다.

오후에는 쏟아지는 비 속에서 개선문 광장으로 차량 시가 행진을 하며 시민들을 만났다. 19세기 교육개혁가 쥘 페리(Jules Ferry) 기념관과 위대한 과학자 마리 퀴리의 기념관을 들러 시민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그는, 교사의 대규모 충원과 질 높은 훈련 기회 제공 등 교육 환경 개선을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할 것임을 역설했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의 메르켈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궂은 날씨에 올랑드를 태운 대통령 전용기가 이륙 직후 벼락을 맞는 바람에 급히 회항하여 두 번째 비행기로 갈아타고 날아갔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철렁했을 이 뉴스를 보도하며 언론들은 프랑스와 유럽연합이 당면한 험난한 현재 상황, 그리고 이날 정상회담의 맞상대인 메르켈과의 첨예한 입장 대립과 갈등을 예고하는 듯 하다고 해석했다.

올랑드와 메르켈은 오늘 처음 만났다고 한다.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두 사람은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머물기를 바라며, 유럽연합의 미래를 위해 함께 일해 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강조하는 메르켈 앞에서 올랑드는, 향후 (독일이 금기시하는) 유로본드(Eurobonds) 등 모든 의제를 테이블 위에 올릴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긴축에 방점이 찍힌 유럽연합의 재정 협약에 성장의 차원을 추가하기 위해 재협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메르켈이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큰 이견이 없음을 강조하며 둘 사이의 뚜렷한 입장차를 수사적으로 봉합하려는 자세를 취한데 대해, 올랑드는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시각을 대변하여 새로운 유럽연합의 정치경제적 경로를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적극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어제 독일의 베스트팔렌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압승을 거둠으로써 보수 기민당과 메르켈 총리의 입지는 한층 줄어들었는데, 바야흐로 메르켈-사르코지 동맹 축이 무너지면서 유럽연합의 정책 기조와 방향이 크게 변화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뉴스 화면과 사진으로 본 행사 풍경에서 느낀 몇 가지 단상을 추가한다. 엘리제 궁에서 거행되는 프랑스의 대통령 취임식은 흡사 입헌군주제의 대관식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요소가 있어 흥미로웠다. 개선문 광장까지 카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거센 빗줄기를 그냥 맞으며 손을 흔들고, 차에서 내린 뒤에는 인도에 환영하러 나온 시민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올랑드의 모습에선 'Mr. Normal'(보통 사람)로 불리는 이 지도자의 시민친화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그러나 취임식 날 바로 독일로 건너가 정상회담을 전개하는 발빠른 행보에서는, 심각한  재정 위기의 한 복판에 놓인 그리스가 각 정파의 이해관계 차이로 결국 정부구성에 실패하고 조기 총선을 치르기로 한 가운데 프랑스와 유럽연합이 갖고 있는 긴박한 위기 의식이 느껴진다.

또, 취임식 직전 전임 대통령 사르코지와 30분간 따로 회동하면서 핵무기의 발사 코드를 승계했다는 보도를 접하니 프랑스가 핵강대국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한 사람의 수중에 저와 같은 엄청난 대량살상무기의 최종 발사 권한이 주어진다는 현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한편, 프랑스의 심각한 교육 불평등, 그리고 소외 계층과 이민자 가족 청소년들의 사회 통합 위기에 대해 교사 6만명을 충원하는 등 대대적인 교육 지원 정책을 통해 접근하고 있는 올랑드와 사회당의 대담한 전략이 매우 인상적이다. 2005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방리유 사태가 보여주듯, 프랑스는 신자유주의적 교육, 노동 정책이 불러온 심각한 교육 불평등과 청년 실업에 더해 국가적 정체성과 사회 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이민-문화-치안 정책이 결합되면서 상당히 권위주의적이고 배제적인 사회로 퇴행하는 조짐을 보여왔다. 대규모 신규 고용에 따른 국가의 재정 부담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사민당)이 견지해야 할 바람직한 정치적 가치와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접근을 결합시킨 노력으로 생각된다.

한참 논문을 쓰던 중이라 몇몇 뉴스와 신문 기사(BBC, Guardian, Le Monde, France24 등)를 참고해 간략히 정리했다. 이번 프랑스 대선과 사회당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과 유럽연합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주요 국가 및 정치세력들의 대응 방향 등에 대해 계속 팔로우업을 해보기로 하자.

엘리제 궁의 취임식 


빗 속의 파리 시가 행진 


개선문 앞에 도착한 올랑드 대통령 


시민들 속으로 


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하는 올랑드와 메르켈


  

2012년 5월 7일 월요일

한국에서 온 첫 손님

1.

지난 주말 한국에서 온 첫 손님을 맞았다. 한림대 국제대학원에서 북유럽 복지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김순영 박사와 지난 해 이화여대에서 스웨덴 복지국가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 중인 장선화 박사가 그 주인공. 두 분은 북유럽 국가들의 현지 연구를 위해 스웨덴, 덴마크 등을 둘러보는 일정에 주말을 이용해 핀란드를 잠시 다녀갔다.
 
재미난 것은 이 블로그에 내가 쓴 올해 핀란드 대선 분석 글을 장선화 박사가 우연히 보고 연락해온 일이다. 정작 한국에서는 일면식도 없던 분들을 여기 손님으로 맞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장선화 박사는 지난 해 내가 강사로 활동한 경희대 시민교육 객원교수이신 김윤철 선생님의 부인이라니,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하다.
 
2. 

스톡홀름에서 배편으로 헬싱키를 와서 다시 기차로 땀페레까지 도착한 두 분을 위해 땀페레 시내와 호수 주변을 안내한 뒤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관심 분야와 방향이 비슷하게 겹치는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기울이니 금세 시간이 흘러갔다

스웨덴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과 최근의 도전들, 이들 나라의 합의적 의사결정 구조와 적극적 민주주의, 스웨덴 사민당의 올로프 팔메 등 정치 지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 핀란드 교육제도의 특징과 성공 비결, 핀란드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이민자 문제, 최근 한국의 복지국가 담론과 연구 동향 등을 놓고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갔다.

마치 오래된 벗들이 찾아온 것인 양 기쁘고 반가웠다. 손님들이 오자 선재는 신이 났고, 아내도 즐겁게 식탁의 대화에 함께했다. 11시가 넘도록 먼 하늘에 푸른 빛이 감도는 이곳 풍경을 두 분은 신기해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오전에는 땀페레 시립 도서관에 있는 무민 박물관을 찾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장선화 박사는 이미 <무민 이야기>의 팬이었다. 토베 얀손의 독특한 삽화들과 무민 동화의 인상적인 장면들, 그리고 착하고 인정 많은 무민네 가족과 자유로운 방랑자 스너프킨, 철학자 사향뒤쥐, 식물 채집가 헤물렌 아저씨와 심술궂은 꼬마 미, 잃어버린 마법 모자의 행방을 찾아 달나라까지 다녀오는 마법사와 표범 등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충실하게 재현해놓은 박물관 내부를 함께 둘러봤다

시청 광장 주변과 남쪽 호수 주변을 산책한 뒤 함께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월요일부터 다시 강의를 해야 하는 장선화 박사가 먼저 헬싱키 공항으로 떠났다.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하는 김순영 박사는 그냥 그날 저녁을 우리 집에서 더 머물기로 해 시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집으로 모셔왔다. 핀란드의 다양한 맥주들, 특히 블루베리와 클랜베리를 넣어 만든 맥주들을 함께 마시며 저녁 나절 대화를 이어갔다. 베리 맥주들은 나도 처음 맛보았는데 맛과 향이 괜찮았고, 과연 온갖 종류의 베리 음식들로 풍요로운 핀란드의 특산물이라 할 만 했다  

3.  

마침 프랑드 대통령 선거의 결선 투표 결과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사회당 후보 홀란드(Hollande)가 현 대통령이던 사르코지를 근소한 차이로 눌렀고, 이는 17년만의 사회당 재집권이었다. 재정 위기에 처한 유럽의 미래와 프랑스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더불어 유럽연합의 보수적 동맹 축(Sarkozy-Merkel Axis)을 이끌어온 사르코지가 몰락함으로써 이른바 '메르코지' 협약이 표방해온 긴축과 예산 삭감을 통한 재정건전성 회복이라는 유럽연합의 재정 정책 기조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됐다. 홀란드는 유럽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 긴축이 아니라 적극적 공공 재정의 투자를 통한 성장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유럽중앙은행 ECB의 주요 임무로 물가 안정만이 아니라 성장이 명시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당선되면 EU 재정 협약을 재협상하겠다고 공약해왔다.
 
프랑스는 20121월 국제신용평가회사 스탠다드앤푸어스(Standard & Poor’s)로부터 국가신용등급이 AAA에서 AA로 강등된 바 있고, 현재 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이, 사르코지는 재임 기간 동안 독재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과 언론에 대한 통제 등으로 인해 2010<이코노미스트>지가 프랑스를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에서 "결함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강등하는 등 프랑스 민주주의의 후퇴를 불러온 것으로 평가받는다.(Hellen Drake, France,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50, 2011, p.970-979)
 
그는 또, 이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화주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구함으로써 인종적 차별주의 정책을 시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정책적 실패로 인해 사회당의 재집권이 가능한 공간이 열렸지만, 동시에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이끄는 극우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입지가 더욱 커진 것도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앞으로 홀란드의 사회당 정부가 프랑스와 유럽의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실업과 빈곤, 이민 문제 등에 대한 효과적 사회통합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마린 르 펜의 호언대로 프랑스 정치 지형은 다시 우경화되면서 위태로와질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유럽 정치의 변화를 예고하는 현장을 TV로나마 지켜보면서 대화하던 우리는,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사민당의 성장 과정에서 보이듯,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화적 자유에 대한 기본적 신념과 헌신 없이 현대의 진보 정치가 설 자리는 있을 수 없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의 무기력한 패배에 이어 이토록 구태의연한 진보 정당의 자화상이라니, 멀리서도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가 참 어렵다.

4.   

함께 토론하고 모색할 것이 많았지만 이제 김순영 박사도 심야 고속버스로 헬싱키 공항까지 가야했다. 훗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새벽 2시를 넘어 3시를 향해가는 땀페레 시내를 함께 걸었다. 인적이 끊긴 거리를 조용했고, 잠시 들른 땀페레 대학 도서관의 24시간 독서실만 환하게 불켜져 있었다. 여러 갈래의 선로가 멀리 흘러가는 한밤의 기차역 풍광을 내려다보았고, 건축 양식이 독특한 러시아정교회의 붉은 색 교회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터미널에 도착해 잠시 기다린 뒤 김순영 박사는 310분 버스를 타고 떠났다. 무사히 좋은 여행 하시기를 빌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인연으로 이역만리까지 뜻이 통하는 분들이 찾아온다. 짧은 만남에도 깊은 우정을 쌓은 것만 같다. 멀리서 오신 두 벗님들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하며, 여기 우리 가족의 첫 한국 손님 맞이를 기록해둔다.


 * 한국에서 오신 장선화, 김순영 선생님과 함께



*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사회당 홀란드 후보와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환호하는 파리 시민들(France24 뉴스 화면)

* 새벽 3시 땀페레 기차역의 풍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