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18대 대선 소감 2 - 성찰, 혁신, 실천!

5.
 
이번에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 몇 일간 칩거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박근혜 정부 5년의 전망과 이른바 민주진보 정치세력의 과제는 무엇일까 하구요. 정리된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박근혜 정부가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예단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꾸로 몇 가지 주요 정책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가령, 남북관계에 있어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는 파격적 조치가 나올 수도 있고, 재벌 개혁이나 경제민주화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 전부터 김종인씨가 강조했듯이, 박근혜 당선인이 독일의 메르켈 수상을 모델로 삼아 보수층의 강력한 지지와 야당에 대한 유화적 스탠스를 토대로 개혁적 보수 정책을 펼치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 이명박 정부의 실패로 거론되는 정책들을 일정한 수준에서 개선하는 전략을 취할 수 있겠지요. 인사정책이나 4대강 사업, 그리고 언론, 검찰 개혁 등이 해당될 수 있겠습니다. 이 경우 김영삼 정부 초기와 같은 개혁 국면이 조성되면서 상당한 지지와 인기를 구가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지지도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이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박근혜 정부의 초기 정책이나 인사가 행해진다면 큰 대비 효과를 누릴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가정 하에서 민주진보진영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반대 투쟁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오히려 박근혜 정부가 이와같은 개혁 정책을 취할 경우 민주당은 이를 적극 인정해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제안을 하고, 가능한 최대한의 수준에서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물리적 힘의 대결 논리가 아니라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상대의 에너지 흐름을 타고 차원을 넘어가는 접근입니다. 이를 통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주의,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정초하고 이를 제도화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전후 독일(서독)의 경제적 재건과 민주적 성공을 이끈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사실 독일 사민당이 아니라 아데나워 총리가 이끈 기민당 집권기(1949~1963)에 첫 단추가 꿰어졌고, 이후 사민당 집권기에 더욱 공고해졌다는 역사적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겠지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또 어떤가요? 사민당이 보수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시작한 사업이 극적인 냉전 해체의 국제정세를 타고 결국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이끌던 시기에 독일 통일로 결실을 맺지 않았습니까?
 
복지국가의 건설이나 남북의 평화 통일과 같은 사안은 특정 정치 세력의 헌신적 노력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물론 진보세력의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지금은 사회적 합의의 토대를 건설하고 그 합의의 프런트 라인을 한 발짝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한 시점임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셋째, 그러나 과연 이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성공하는 개혁적 보수 정부의 길로 나아갈까요? 민주진보진영은 협소한 네거티브적 접근법의 관성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장기적 안목으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여당 정부에 대한 비판적 견제와 대국적 협상에 임하는, 높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이 또한 결론을 예단할 수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대로 권위주의적 불통정부가 연장되는 것에 불과하고, 집권자의 의지 부족이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시늉만 내는 개혁이거나 오히려 개악되는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 민주당부터 진보정당들까지 개혁 실패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다가 일정한 시점에서 중대한 정부 실패가 빚어지거나 사회적 저항이 확대되는 시점에 이르면 전면적인 반대 투쟁에 나서고, 결국 선거 때가 다가오면 별다른 정책적 준비와 실행 과정 없이 적당한 후보를 찾아 다시 정권심판론을 들고 나오는 수순도 예상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국제정세, 그리고 국내 시민사회의 갈등구조와 역학에 따라 부침하게 될 다양한 상황도 세밀하게 고려해야 할 변수가 되겠지요.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와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새로운 현실 인식과 대담한 자기 혁신, 그리고 이를 통한 한국 정치의 질적 전환의 가능성입니다. 박근혜 후보가 TV 토론에서 그래서 대통령이 되려고 하잖아요!”라는 말을 반복하자 네티즌들은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대통령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을 지금부터 하면 된다고 말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상을 찾아내 이를 반박한 일이 있었지요. 저는 지금 이 말을 멘붕에 빠져 허우적대는 민주진보진영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민주당이든 새로운 국민정당이든, 자신들이 집권하면 하려 하는 일들을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지국가 건설이든, 경제민주화 실현이든, 남북한의 평화 통일이든, 새정치 실현이든, 또 다른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5년간 입법과 정책, 현장의 실천과 운동, 국제적 협력과 시민사회 소통 등 모든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와 성과를 일구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정부에 협력하여, 때로는 정부를 비판하면서, 때로는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면서 말입니다. 제발 민주당이, 안철수 캠프가, 진보정당들이 정신을 차리고 아프게 교훈을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6.
 
지난 5년의 경험과 이번 대선 결과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 역동적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를 이룬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이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특히, 헝가리에서 최근 보수주의 정당이 집권한 뒤 합법적 절차를 통해 헌법과 각종 기본적 법률과 제도를 자신들에게 영속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개악함으로써 권위주의로의 퇴행을 가져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사례가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큰 것 같습니다.
 
새삼 민주주의란 결코 고정된 상()일 수 없으며, 일순간에 만들어지거나 도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끊임없는 시민적 성찰과 학습, 그리고 제도적-비제도적 실천을 통해 함께 기르고 가꾸어가야 할 무엇이겠지요. 민주주의 시민교육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선거 이후 벌써 4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우울한 소식 들었습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매일 42.6, 매년 약 15,000명이 자살하는 등 OECD 최고의 자살률을 몇 년째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의 일상이 마치 무슨 내전을 치루는 나라처럼 극심한 불안과 스트레스, 위기감과 절박감을 던져주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방치한 채 어떤 정부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어떤 정치세력이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박근혜 정부가 성공하고 싶다면 선거 승리의 도취에서 빨리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개혁적 보수 정부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초기의 인수위와 내각, 청와대 인사는 그 방향을 가늠해볼 시금석이 될 겁니다. (빨리 윤창중 수석대변인 임명 철회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의 정치세력들이야말로 치열한 성찰과 혁신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입으로만 성찰과 혁신을 외지 말고 실질적인 변화의 노력과 가시적인 결과물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추상적 언명과 다짐은 이미 많은 시민들에게 식상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뼈저린 각성이 없다면 내일의 기약도 어려울 것입니다.
 
대선 패배 이후 당권을 둘러싼 내분에 휩싸여있는 민주당에 말씀 드립니다.
 
당신들이 할 일은 노동자들의 자살 행렬에 대해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 형식적인 조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입법, 정책, 정치적 실천의 영역에서 책임있는 행동을 다 하는 것이오!”
 

댓글 1개: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대선 결과를 접하고, 페루의 독재자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의 낙선하는 장면이 대조적으로 떠오르더군요. 아버지의 이혼으로 19세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고, 아버지의 하야 후 대선에 출마해 "내가 당선이 되면 부정부패로 감옥에 들어간 아버지를 석방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페루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그녀.

    반면, 비슷한 인생경로를 걸어온 박근혜는 한국에서 당선을 이루어 냈습니다.
    "아~ 한국인들이 페루인들보다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
    너무 지나친 일반화일 수 있지만, 당선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여성대통령이 탄생한다는 것은 반길 일입니다.
    하지만, 그 첫 주인공이 박근혜여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왜 그녀를 지지했는지 아직도 이해를 할 수가 없지만) 박근혜는 그 상징성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민주주의 선거의 결과이니 받아들여야죠. 나의 의견만큼 박근혜를 지지자들의 의견 역시 경청해야겠죠. (그들의 선택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정치인들 욕하면서도 90%의 투표율을 보여준 50대 '참여정치'의 정신은 존경합니다.)
    미국에서 홈스테이를 했을 당시 주인 아주머니께서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조지 부시가 연임되는 것을 보고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10년이 걸렸더라도 정권교체를 이루어 냈기 때문에 아직 미국인들은 위대하다는 소릴 들을 자격이 있다."

    그래도 선거제도라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5년에 한번씩 정치인들이 굽신거리게 할 수 있는 거겠죠. 이제 그 압박을 생활 속에서 상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글에서 언급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죠. 항상 정치인들의 감시견이 되어 그들 행동이 올바르게 갈 수 있게 조타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문화'가 핏속에 흐르는 사람으로서 박근혜 당선인이 '한국을 위해' 앞으로 5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길 기원합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윤창중, 이동흡 같은 인사들을 선택하는 것이나, 비정규직 전환의 양적 달성을 위해 정부 출연 연구소의 비정규직 연구원들을 아예 해고로 내모는 움직임(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568410.html) 등은 그 기대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문재인 캠프에서 찬조연설 했다는 이유로 출연정지를 시키는 방송국의 고위직원들 같이 알아서 기는 사람들이 없어질 수 있는 환경도 조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검찰, 언론 개혁에 이르는 첫걸음이겠죠.

    부디 내걸었던 공약들 올바른 절차로 잘 지키길 바랍니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 개인적으로 이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점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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