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4일 목요일

3. 메트로, 호텔, ‘프로둑띠’, 트램에서 만난 또 하나의 뻬쩨르부르그

- "2014년 여름, 러시아 썅뜨 뻬쩨르부르그 여행기"
 
핀란드 역 앞의 레닌 동상을 뒤로 하고 네바 강변을 따라 걸었다. 다시 긴 다리를 건너 시내 중심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네바 강은 우리의 한강만큼이나 넓었고, 차들은 강변도로를 달리듯이 쌩쌩 달렸다. 다리를 건넜더니 도시의 모습이 점차 바뀌면서 관광책자에서 보았던 샹뜨 뻬쩨르부르그의 모습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한참을 걸었더니 깨끗한 4성급 호텔이 하나 보였다. 옳거니, 저기 가서 다시 길을 물어보기로 했다. 데스크를 가서 영어로 물었더니 다른 직원을 불러주었다. 기다리면서 보니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에 수건을 받쳐놓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 이 직원은 친절하게 정보를 찾아 잘 설명해주고 지도를 꺼내 표시까지 해주었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영문 지도가 아니라 러시아어 지도였다!) 이번에는 이 직원의 안내대로 메트로를 타고 가기로 했다. 강을 건너면서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큰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메트로는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어렵사리 메트로를 찾아 들어가 28루블씩을 내고 토큰을 산 뒤 경사진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플랫폼으로 내려가는데 그 길이가 족히 2백 미터는 될 것 같았다. 지하철역들은 대개 1930년대 소련 시절에 건설되었을 것인데, 그들은 왜 이렇게 깊은 동굴을 파야만 했을까 싶었다. 핵전쟁이 나도 끄덕없었을 것 같고, 서구에 대한 기술발전의 과시 목적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깊이 파내려간 노동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보다 이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러시아 시민들의 표정이 어둡고 무거워 보였다. 잠깐의 신기함을 뒤로 하니 지하로 내려가는 우리부터도 어딘지 억눌린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밝지 않았다.
 
메트로에 올랐더니 낡은 기차가 굉음을 울리며 빠른 속도로 터널을 스쳐갔다. 에어콘을 틀지 않기 때문인지 창문들을 열어 놓아 엄청난 소음과 탁한 공기가 객차 내로 들어왔다. 승객들은 대개 무표정한 듯 약간 화가 난 얼굴로 침묵하거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약간 불안해 보이는 한 젊은 남성이 전화를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초현실적이고 우울한 지하 세계의 느낌! 기차를 한 번 갈아탄 뒤 목적지에 도착해 다시 긴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우리 가족 모두 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역사를 빠져나왔다. 지하철과 그 주변의 풍광이 빚어내는 공간 체험은 20세기 이후 현대 도시생활자들의 공통된 문화적 경험에 속하는 것이지만, 매일 메트로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러시아 시민들에게 이 소비에트적 공공 건축의 유산은 오늘도 심리적 침식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듯 했다.
 

 
 
메트로에서 호텔까지 다시 10여분을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이면도로에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별다른 안전막이나 가림대조차 설치하지 않은 채 인도를 길게 파헤쳐놓았다. 심지어는 한 지점에서 수도관이 터졌는지 흙탕물이 솟구쳐 도로 일부가 침수된 채 방치돼 있었다. 속으로 개탄을 하면서 어렵사리 호텔을 찾아들어갔더니 이번에는 호텔의 외관이 리모델링 중으로 긴 가림막이 쳐 있었다. 데스크의 여직원은 낯선 아시아인을 보고 조금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처음엔 가림막이 쳐있는 방을 주어서 새로 요청해 방을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건물 뒤편이 온통 공사중이 아닌가! 허허, 첩첩산중이로세! 애초 뻬쩨르부르그의 도시 규모를 가늠하지 못하고 약간 도시 남쪽에 있는 호텔을 잡은 것이 실수였다. 인터넷에서는 외관이 깨끗하고 가격도 적당해 선택했는데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아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지만, 이미 인터넷으로 3박 요금을 다 지불하고 환불도 안 되는 조건이라 어쩔 도리가 없는 상태였다.
 
방에 들어가 여장을 푼 뒤 나는 까무룩 낮잠이 들었다. 벌써 긴 여행을 마친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잠이 깨 샤워를 하는데 흙탕물이 섞인 듯 물색깔이 누렇고 탁했다. 아차, 바깥 도로에 물이 넘치더니 그 여파인 모양이었다. 유쾌하지 않았지만 참고 샤워를 마친 뒤 데스크에 내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 그런데 데스크의 직원들은 외부 공사 때문에 그런 것 같다며 어쩔 수 없다는 설명만 할 뿐 적극적인 사과나 어떤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 같은 것이 없었다. 순진하게 예쁘게 생긴 여직원은 영어마저 서툴러 스스로 곤혹스러워했다.
 
저녁을 먹으러 다시 시내로 나갔다. 메트로는 타고 싶지 않아 이번에는 지상으로 다니는 트램을 타기로 했다. 정거장 가는 길에 마실 물을 하나 샀다. 편의점 같은 것이 있나 둘러봤는데 보이질 않고, 낡고 오래된 벽돌 담벼락들 사이로 작은 가게가 하나 보였다. 간판을 보니 러시아어로 프로둑띠’(ПPOДУKTУЫ, PRODUCTI, 말 그대로 물건파는 상점이라는 뜻)라고 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둡고 좁은 실내에 식료품과 담배와 술 등 기호품을 판매하는, 예전의 우리네 골목길 구멍가게가 연상됐다. 세월이 멈춘 듯한 풍경이었다. 간단한 숫자조차 영어로는 소통이 안 되는 초로의 노인이 앉아 무뚝뚝한 얼굴로 돈을 받고 거슬러주었다.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처럼 생각하고 당연히 다수 사람들이 영어를 할 줄 알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착각이라니
 
뻬쩨르부르그의 중심가인 네브스키 프로스펙트근처로 가는 트램이 와서 올라탔다. 트램과 버스의 승차비는 25루블인데, 전자카드도 사용되지만 차장이 따로 있어 돈을 내고 회수권 모양의 티켓을 받았다. 주로 나이든 여성 노동자들이 좌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티켓을 끊어주었다. ‘아직도 차장이 있네’, ‘이건 우리 옛날 회수권 모양이야’, 아내와 나는 신기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중년의 여성 기관사가 운전하는 모습이 투명 가림막 너머로 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상념에 잠겼다. 여행 책자에서 본 아름답고 화려한 옛 영광의 도시, 러시아의 유럽으로 난 창, 북방의 베네치아, 피터 대제가 건설한 샹뜨 뻬쩨르부르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 나는 그 때 여행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오늘 나를 맞이한 건 공교롭게도 피터의 도시(Petersburg)가 아니라 레닌의 도시(Leningrad),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소비에트연방 체제가 남긴 편린들의 연속이었다. 내내 예상치 못한 풍경과 당혹스러운 경험의 연속이었지만 그 덕에 역사의 한 지층과 그것이 표층의 현재와 교우하고 있는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서구 중산층 여행 소비자의 시선을 따라가지 말고, 역사와 자연과 운명의 힘을 때론 거스르고 때론 순응하며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응시하는 여행자가 되어보자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겪은 자잘한 어려움들은 오히려 달빛에 빛나는 조약돌 같은 행운의 표지들로 여겨졌다.
 




 
저녁은 시내의 한 조지아(Georgia) 식당에서 먹었다. 터키 음식과 유사한 듯 했는데 정갈하고 맛이 있어 기운이 났다. 전채로 주문한 가지 샐러드는 우리의 가지 무침과 아주 비슷했다. 조지아는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나라로 러시아, 터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제국에서 독립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 연방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탈린이 본래 조지아 출신이었는데, 당시 그는 조지아 민족주의자 십만 명 이상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2008년에는 조지아 내부 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분쟁 지역 소재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개입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조지아가 큰 피해를 입고 일부 지역은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 사건은 최근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러시아가 사실상 무력 병합한 사건과 흡사해 다시 한 번 국제적 조명을 받았다. 지정학적 위치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적 분쟁에 계속 시달리는 사람들의 아픔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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