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2일 화요일

2014년 여름, 러시아 샹뜨 뻬쩨르부르그(St Petersburg) 여행기

 
1. ‘핀란드 역으로’: 기차를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다
 
2014712일부터 15일까지 34일 일정으로 샹뜨 뻬쩨르부르그 여행을 다녀왔다. 여름 방학을 맞아 아내랑 선재와 더불어 가족여행을 떠난 것.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옆 나라 러시아의 역사적 도시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그 동안 주로 여행한 나라들이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어서 이번에는 동쪽으로 한 번 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이면 국경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었는데, 20세기의 혁명가 레닌이 이 기찻길을 이용해 핀란드로 망명했고, 나중에 다시 기차로 귀국해 혁명을 이끌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품어내는 여행의 낭만’(?)이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국민시인 쁘슈낀과 <죄와 벌>의 작가 도스또예쁘스끼 문학의 산실이 아닌가!
 
인터넷으로 기차표를 알아보고, 우리가 묵을 호텔을 예약한 뒤 짐을 꾸려 712일 토요일 새벽 437분 기차를 탔다. 오전 느긋한 시간과 오후에 떠나는 기차는 가격이 두세 배 이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새벽 기차를 타야했다. 전날 늦게 잠든 선재를 새벽 3시 반에 깨워 간단히 옷만 입힌 뒤 집을 나섰다. 선재는 졸려하면서도 잘 일어나 씩씩하게 길을 걷는다. 백야의 땀뻬레, ‘일마린까뚜’(Ilmarinkatu)의 아파트들과 그 너머 키 큰 자작나무들 위로 다시 동이 트고 바람이 시원했다. 차 없는 거리에 자전거를 탄 사람들만 간간히 지나쳤다. 역까지는 걸어서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에 도착하니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핀란드 북쪽에서부터 밤새 달려온 기차 안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다양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의 기대감 탓인지, 갈아타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우리는 기차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지나는 호수에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여름 하늘은 상쾌했고, 대지는 푸르게 출렁였다. 붉은 적갈토 색깔의 시골집들이 단정하고 깨끗한 얼굴을 하고 서 있다. 50분쯤 달리자 푸른 나무 벽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성, 하멘린나(Hämeenlinna)가 호수에 떠 있는 듯, 가라앉은 듯 신비롭게 나타났다. 553분에 첫 번째 경유지 리히마끼(Riihimäki)에서 내렸다. 역사 바깥을 잠깐 나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통근 열차로 갈아타고 라흐띠(Lahti)에 내리니 654. 플랫폼에는 우리와 같은 승객들이 제법 많았다.
 
아침 72, 헬싱끼에서 출발해 삐에따리(Pietari, 뻬쩨르부르그의 핀란드 이름)로 가는 기차가 들어왔다. 우리 자리를 찾아 가방을 짐칸에 올리고 앉으니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방송은 핀란드어, 러시아어, 영어로 계속됐다. 기차가 국경을 넘기 전에 출입국 경찰의 체크가 있으니 미리 러시아 입국 카드를 작성하라고 했다.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 여권번호 등을 적은 뒤 여행 목적과 행선지 주소 혹은 호텔 이름을 두 장씩 기재하도록 돼 있었다. 승무원이 나눠준 카드를 작성했다. 객차 안에서 두 사람이 돌아다니며 유로와 루블화를 환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전날 땀뻬레 시내의 Nordea 은행에 들러 루블화를 환전했는데, 기차 안이 훨씬 싸고 수수료도 적은 듯 했다. 첫 번째 러시아 여행의 수업료인 셈 쳤다. 얼마 뒤 세관원이 지나다니며 관세 신고할 것이 있는지 점검했다. 신고할 아무 것도 없다고 하니 가방이 어딨냐고 물었다. 짐칸에 있는 작은 가방 하나와 백팩 2개가 전부라고 하니 무사 통과.
 
그 사이 기차는 계속 러시아 국경을 향해 달렸다. 핀란드 어디나 울창한 숲과 호수가 번갈아 나타나는 비슷한 풍광이지만, 기차가 동쪽으로 달리자 약간 언덕진 구릉들이 많이 보였다. 여름 하늘은 광활하고 숲은 더 깊어지는 듯 했다. 2시간 만에 꼬우볼라(Kouvola), 그리고 핀란드 쪽의 마지막 역인 바이니깔라(Vainikala)를 지났다. 국경을 넘기 전에 핀란드의 국경 관리 경찰이 다니면서 출국 심사를 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도장에는 출국 날짜와 함께 유럽연합(EU) 국가 핀란드의 표시와 함께 기차 문양이 새겨져있다. 국경을 넘자 이번에는 러시아의 국경 관리 요원들이 다니면서 입국 심사를 했다. 여권과 입국 카드를 보여주고, 영어로 몇 가지 문답을 했다. 그녀는 잠이든 선재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여권을 휴대용 전자기기에 대고 문지른 뒤, 다시 여권 공란에 입국 허가 도장을 찍어주었다. 출입국 심사관 특유의 관료적 표정이던 그녀는 잠시 뒤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입국 카드를 잘못 가져갔다며 한 장을 바꿔서 돌려주었다. 나의 실수였나 했더니 자기 잘못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고, 우리는 서로 웃으며 인사했다. 제복 안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인간적 표정을 잠시 만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핀란드와 러시아 혹은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경계를 넘었다.
 
국경 너머의 첫 러시아 역은 뷔보르그(Vyvorg). 핀란드어로 비뿌리(Viipuri)라 불리는 이곳은 13세기 이래 스웨덴 지배 하 핀란드령에 속했으나 18세기 초반 피터 대제에 의해 러시아 영토에 편입됐다. 다시 1809년 러시아 차르 치하의 핀란드 대공국 소속으로 변경된 뒤 1917년 독립 후에는 그대로 핀란드 영토가 됐는데, 한 때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핀란드와 소련의 두 차례 전쟁 끝에 다시 소련의 영토로 편입됐다. 이 때 핀란드는 영토의 약 20 퍼센트를 잃었고, 뷔보르그를 포함한 동쪽 까렐리아 지방의 주민 수십만 명이 집과 땅을 잃고 서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작년에 수강했던 핀란드어 코스의 선생님 한 분도 이 때 부모와 가족들이 까렐리아에서 땀뻬레 근처로 이주해왔다고 했다. 스웨덴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입양된 어린이들도 많아 이들의 스토리가 지금도 TV 다큐멘타리 등에서 자주 등장한다. 뷔보르그는 그렇게 러시아와 핀란드 관계사의 변천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영토로만 남아 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무거운 가방을 끌거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역사를 빠져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기차가 국경을 넘으니 풍광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숲과 호수와 도시가 이어지는 것은 비슷한데 숲은 핀란드 쪽보다 조림이 어수선했고, 황무지같은 언덕들이 자주 나타났다. 철로 주변의 아파트와 건물들은 대개 낡고 지저분한 차림새였다.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차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고, 붉은 색과 회색을 나란히 칠한 러시아 열차들도 보였다. 공간의 변화와 함께 시간의 변화도 함께 일어나는 양, 핀란드와는 왠지 확연히 다른 사회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면서 약간의 긴장이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짓 더 가자 대도시 주변의 풍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핀란드와 한 시간의 시차를 두고 러시아 시각으로 오전 1048, 기차는 삐에따리, 아니 샹뜨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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