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7일 월요일

한국에서 온 첫 손님

1.

지난 주말 한국에서 온 첫 손님을 맞았다. 한림대 국제대학원에서 북유럽 복지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김순영 박사와 지난 해 이화여대에서 스웨덴 복지국가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 중인 장선화 박사가 그 주인공. 두 분은 북유럽 국가들의 현지 연구를 위해 스웨덴, 덴마크 등을 둘러보는 일정에 주말을 이용해 핀란드를 잠시 다녀갔다.
 
재미난 것은 이 블로그에 내가 쓴 올해 핀란드 대선 분석 글을 장선화 박사가 우연히 보고 연락해온 일이다. 정작 한국에서는 일면식도 없던 분들을 여기 손님으로 맞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장선화 박사는 지난 해 내가 강사로 활동한 경희대 시민교육 객원교수이신 김윤철 선생님의 부인이라니,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하다.
 
2. 

스톡홀름에서 배편으로 헬싱키를 와서 다시 기차로 땀페레까지 도착한 두 분을 위해 땀페레 시내와 호수 주변을 안내한 뒤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관심 분야와 방향이 비슷하게 겹치는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기울이니 금세 시간이 흘러갔다

스웨덴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과 최근의 도전들, 이들 나라의 합의적 의사결정 구조와 적극적 민주주의, 스웨덴 사민당의 올로프 팔메 등 정치 지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 핀란드 교육제도의 특징과 성공 비결, 핀란드의 역사-문화적 정체성과 이민자 문제, 최근 한국의 복지국가 담론과 연구 동향 등을 놓고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갔다.

마치 오래된 벗들이 찾아온 것인 양 기쁘고 반가웠다. 손님들이 오자 선재는 신이 났고, 아내도 즐겁게 식탁의 대화에 함께했다. 11시가 넘도록 먼 하늘에 푸른 빛이 감도는 이곳 풍경을 두 분은 신기해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오전에는 땀페레 시립 도서관에 있는 무민 박물관을 찾았다. 두 아이를 키우는 장선화 박사는 이미 <무민 이야기>의 팬이었다. 토베 얀손의 독특한 삽화들과 무민 동화의 인상적인 장면들, 그리고 착하고 인정 많은 무민네 가족과 자유로운 방랑자 스너프킨, 철학자 사향뒤쥐, 식물 채집가 헤물렌 아저씨와 심술궂은 꼬마 미, 잃어버린 마법 모자의 행방을 찾아 달나라까지 다녀오는 마법사와 표범 등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충실하게 재현해놓은 박물관 내부를 함께 둘러봤다

시청 광장 주변과 남쪽 호수 주변을 산책한 뒤 함께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월요일부터 다시 강의를 해야 하는 장선화 박사가 먼저 헬싱키 공항으로 떠났다.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하는 김순영 박사는 그냥 그날 저녁을 우리 집에서 더 머물기로 해 시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집으로 모셔왔다. 핀란드의 다양한 맥주들, 특히 블루베리와 클랜베리를 넣어 만든 맥주들을 함께 마시며 저녁 나절 대화를 이어갔다. 베리 맥주들은 나도 처음 맛보았는데 맛과 향이 괜찮았고, 과연 온갖 종류의 베리 음식들로 풍요로운 핀란드의 특산물이라 할 만 했다  

3.  

마침 프랑드 대통령 선거의 결선 투표 결과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사회당 후보 홀란드(Hollande)가 현 대통령이던 사르코지를 근소한 차이로 눌렀고, 이는 17년만의 사회당 재집권이었다. 재정 위기에 처한 유럽의 미래와 프랑스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더불어 유럽연합의 보수적 동맹 축(Sarkozy-Merkel Axis)을 이끌어온 사르코지가 몰락함으로써 이른바 '메르코지' 협약이 표방해온 긴축과 예산 삭감을 통한 재정건전성 회복이라는 유럽연합의 재정 정책 기조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됐다. 홀란드는 유럽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 긴축이 아니라 적극적 공공 재정의 투자를 통한 성장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유럽중앙은행 ECB의 주요 임무로 물가 안정만이 아니라 성장이 명시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당선되면 EU 재정 협약을 재협상하겠다고 공약해왔다.
 
프랑스는 20121월 국제신용평가회사 스탠다드앤푸어스(Standard & Poor’s)로부터 국가신용등급이 AAA에서 AA로 강등된 바 있고, 현재 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있다. 더욱이, 사르코지는 재임 기간 동안 독재적인 국정 운영 스타일과 언론에 대한 통제 등으로 인해 2010<이코노미스트>지가 프랑스를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에서 "결함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강등하는 등 프랑스 민주주의의 후퇴를 불러온 것으로 평가받는다.(Hellen Drake, France,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50, 2011, p.970-979)
 
그는 또, 이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프랑스의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화주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구함으로써 인종적 차별주의 정책을 시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정치적, 정책적 실패로 인해 사회당의 재집권이 가능한 공간이 열렸지만, 동시에 마린 르 펜(Marine Le Pen)이 이끄는 극우 국민전선(National Front)의 입지가 더욱 커진 것도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주목할 부분이다. 앞으로 홀란드의 사회당 정부가 프랑스와 유럽의 경제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실업과 빈곤, 이민 문제 등에 대한 효과적 사회통합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마린 르 펜의 호언대로 프랑스 정치 지형은 다시 우경화되면서 위태로와질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유럽 정치의 변화를 예고하는 현장을 TV로나마 지켜보면서 대화하던 우리는,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사민당의 성장 과정에서 보이듯,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화적 자유에 대한 기본적 신념과 헌신 없이 현대의 진보 정치가 설 자리는 있을 수 없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의 무기력한 패배에 이어 이토록 구태의연한 진보 정당의 자화상이라니, 멀리서도 참담한 심경을 가누기가 참 어렵다.

4.   

함께 토론하고 모색할 것이 많았지만 이제 김순영 박사도 심야 고속버스로 헬싱키 공항까지 가야했다. 훗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새벽 2시를 넘어 3시를 향해가는 땀페레 시내를 함께 걸었다. 인적이 끊긴 거리를 조용했고, 잠시 들른 땀페레 대학 도서관의 24시간 독서실만 환하게 불켜져 있었다. 여러 갈래의 선로가 멀리 흘러가는 한밤의 기차역 풍광을 내려다보았고, 건축 양식이 독특한 러시아정교회의 붉은 색 교회 건물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터미널에 도착해 잠시 기다린 뒤 김순영 박사는 310분 버스를 타고 떠났다. 무사히 좋은 여행 하시기를 빌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인연으로 이역만리까지 뜻이 통하는 분들이 찾아온다. 짧은 만남에도 깊은 우정을 쌓은 것만 같다. 멀리서 오신 두 벗님들의 건승과 행운을 기원하며, 여기 우리 가족의 첫 한국 손님 맞이를 기록해둔다.


 * 한국에서 오신 장선화, 김순영 선생님과 함께



*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사회당 홀란드 후보와 바스티유 광장에 모여 환호하는 파리 시민들(France24 뉴스 화면)

* 새벽 3시 땀페레 기차역의 풍광

2012년 4월 29일 일요일

핀란드의 부활절 스케치

핀란드는 루터리안 기독교(Evangelical Lutheran Church)를 믿는 사람이 85%나 되는 나라여서 대부분의 국경일이 기독교에 관한 것이다. 그 중 부활절(Easter)은 크리스마스 이상으로 중요한 국경일인데, 4월 첫째 주 금요일부터 둘째 주 월요일까지 짧은 휴가에 들어간다. 이번에 우리 가족도 선재 유치원의 다른 핀란드 학부모에게서 초대를 받아 이 곳 부활절 문화를 체험해보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연휴 첫 날 이 아이네 집에서 열린 달걀 찾기 행사(Egg Hunt)에도 참석하고, 둘째날 저녁 호숫가 비치에서 열린 불꽃놀이와 지역 교회의 자정 미사에도 참석해 보았다. 참 소박하지만 유쾌하고 경건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속한 교회와 지역 공동체의 사람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초승달이 뜬 호숫가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어놓고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흥겹게 춤을 추며 노는 모습이 정말 정겨웠다. 마치 우리네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놀이와도 같은 모습인데,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어서 놀랐다. 아마도 핀란드의 원주민인 사미족의 문화가 남아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은데, 바이킹 복장과 수염을 하고 자기 조상이 바이킹 출신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참석한 젊은 이들은 대개 자유분방한 생태 페미니스트들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 노마디즘(nomadism)과 시간 탐험에 관심이 많고 녹색당에도 관여한다는 영국 출신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불꽃놀이를 마친 사람들은 등불을 들고 마을 길을 행진한 뒤 교회로 들어갔다.
삐스빨란 끼르코(Pispalan Kirkko)라는 이름의 교회를 들어서니 10대 청소년들이 합창과 연주를 하는데, 모던 록 풍의 선율에 핀란드어의 음악적인 목소리가 독특한 화음을 자아냈다. 교회는 깨끗하고 심플한 현대적 건축 양식의 건물인데, 핀란드 건축의 독특한 선과 면 분할이 느껴지는 전면부에 성화 세 점이 담긴 병풍이 하나 있고, 그 오른쪽 벽면 가운데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조명을 받고 있었다. , 이 소박함! 그리고 영웅적인 비장미를 최소화한 평범한 일상성의 미학, 그러나 그 속에 경건함이 살아있다.
등불을 들고 들어온 사람들이 옆으로 서자 그 가운데에서 한 젊은 청년이 불꽃 막대 두 개를 돌리면서 마치 마술사와 같은 의식을 진행했다. 불꽃은 그의 온 몸을 빙글빙글 돌면서 원을 그렸고, 그의 입 속에서 꺼졌다가 다시 옮겨 붙었다가, 팔등으로 옮겨 갔다가 손바닥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꺼졌다가 살아났다가, 마지막으로 제단의 촛불에 점화된 뒤 소멸했다. 불꽃으로, 성령(Holy Spirit)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인자(the Son of Man) 예수의 삶과 부활을 상징하는 의식을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정말 현대의 주술사처럼 멋이 있었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리고 이어진 심야의 미사. 그런데 교회의 젊은 사제는 부활절 설교를 마치 한 세련된 대학 강사의 프리젠테이션처럼 진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부활절의 의미와 예수의 삶의 메시지를 윽박지르듯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 의심과 비판적 태도를 갖고 깊이 대화하고 생각할 것을 권하면서, ‘지금, 여기의 내 삶 속에서 예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설교 중간에는 영화 <반지의 제왕> 동영상의 일부(주인공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용암 속에 던지려다 끝내 그 유혹의 힘(반지의 목소리)에 굴복해 돌아서며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장면)를 프로젝터로 보여주면서 지상의 권력을 향한 인간 욕망의 강력함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다시 이어진 합창과 성찬식. 그렇게 미사는 끝이 났고, 사람들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함께 음식을 나누었다. 그곳에서 다시 밤새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논다고 했다. 나는 간단히 차와 빵을 먹은 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인간과 자연이 만나고, 종교와 예술과 건축이 만나는 곳. 세대와 세대가 만나고, 합리적 사고와 경건한 신앙이 만나는 때. 그 속에 예수가 부활하고 있는 듯 했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의 날이 시작되길 나는 기도했다.




 땀페레 사람들의 부활절 Egg Hunt 행사와 불놀이 

이 즈음의 소식

1.     풍경

새벽에 잠이 깨어 쓴다. 벌써 북구의 여름철 풍경을 실감하게 만드는 날씨다. 10시가 넘도록 청초한 하늘 빛이 남아 있고, 새벽 4시 반에 벌써 푸른 동이 튼다. 금요일이 되자 사람들은 오후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카페와 펍, 호숫가 벤치와 천변의 잔디밭까지 점령하고 커피와 맥주를 마시며 계절의 변화를 즐기고 있다. 5월과 6, 땀페레 시내 곳곳에는 다양한 축제와 행사들이 열린다고 하는데 나도 제법 기대가 부푼다. 학교들도 이제 일 년간의 학사 일정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들어갔다. 시험이 끝난 학부생들은 런던으로, 뮌헨으로,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여행 계획들을 서두르는 모양이다. 우리 가족도 올 여름에 가까운 헬싱키, 투르쿠, 스톡홀름 등지를 다녀올 생각이다.

2.     장학금
땀페레 대학교의 장학금 심사 결과 발표가 났다. 다행히 8개월간의 장학금 대상자로 선정됐다. 학과에서는 1순위로 올렸다기에 내심 1년 간의 풀 장학금을 기대했는데, 최근 핀란드도 재정이 넉넉치 않은 상황이라더니 그 여파를 느끼게 한다. 발표를 보니 정치학과가 속한 매니지먼트 대학원에서는 9개월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1명 있고, 나머지 10명 남짓 학생들이 8개월, 6개월, 4개월 장학금 자격을 받게 됐다. 부족한 재원을 가급적 고루 나누는 방식으로 결정이 이루어진 듯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인데, 그렇다고 풍족한 것은 아니어서 아내와 긴축 재정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지도교수와 협의해 핀란드 학술재단에서 제공하는 4년짜리 연구 장학금에도 적극 지원할 생각이고, 주당 25시간의 노동 비자가 있으니 긴 여름 방학을 이용해 아르바이트도 시도해볼 참이다. 아카넷 출판사와 진행하고 있는 유네스코 인권 서적의 번역 작업도 박차를 가해야겠다.


3.     논문과 연구
지난 3월과 4월의 근황을 잠깐 보고한다. 3 12일 학과 세미나에서 박사논문 연구계획을 발표했고, 무사히 마쳤다. 다양한 각도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비판이 이어졌지만 분위기나 태도는 결코 공격적이거나 차별적이지 않았고, 연구계획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초점을 둔 우호적 조언들이었다. 문제를 비껴가지 않지만 그 바탕에는 인격적 존중이 깔려있는 것을 느꼈다. 지도교수도 좋은 자리였다고 격려했다.
이 날 마침 정치학과와 국제관계학과 연구원들의 와인 파티가 있어 들렀는데, 몇몇 교수와 연구원들이 환영해주었다. 특히, 땀페레 대학교 국제관계학과에는 평화연구소가 부설돼있어 국제분쟁과 인권 이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핵과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아랍의 민주화와 시리아 사태 등에 대해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 새삼 우정과 연대감이 자라났다. 나의 박사논문 주제는 북유럽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이 곳에 있는 동안 평화, 인권, 국제관계 등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할 계획이었는데 구체적인 매개 공간을 발견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논문 프로포잘 이후 지금은 논문의 2장과 3장에 해당하는 파트를 쓰고 있는 중이다. 2장은 북유럽 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과 제도적 발전 과정, 최근의 변화와 이슈 등을 간략하게 개관한다. 3장은 논문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는 부분인데, 합의 민주주의 이론을 둘러싼 논쟁을 검토해 본론에서 전개할 경험적 비교 연구를 위한 이론적 관점과 접근 방법, 세부 분석 기준 등을 제시할 계획이다. 5월말까지 우선 2장의 저술을 마무리할 목표로 지금 한창 초안을 작성하고 있다.
그 사이 박사과정생을 대상으로 한 방법론 워크숍에도 참석하고, 연구 방법론 관련 서적과 인터넷 강의 등을 참고해서 장거리 마라톤 주자로서의 준비를 다져오는 중이다. 특히, 매일 2~3시간씩 계속 글쓰기를 하라는 캠브리지 대학교 인류학과 알란 맥팔래인(Alan Macfarlane) 교수의 조언에서 큰 가르침을 얻었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이라면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꼭 참고하시기 바란다.(http://www.youtube.com/watch?v=LlEeTsHBj98)

4.     선재의 배움
선재는 이제 제법 영어 유치원에 익숙해졌다. 8월부터 다니게 될 핀란드 예비학교(pre-school)도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방과 후에 함께 놀 친구들이 아직 없고, 책과 장난감도 부족한 터라 심심해한다. 아빠랑 놀이터를 가거나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큰 즐거움인데, 아빠는 늘 공부해야 한다며 실컷 놀아주질 못하니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한국에서 그리스신화와 무민 동화책과 몇 권의 과학책 등을 새로 부쳐왔는데 금새 수없이 반복해서 다 읽어버리고, 지금은 아빠가 들려주는 삼국지 이야기에 빠져있다. 5월에 다시 책들을 여러 권 구해주어야 할 모양이다.
기특한 것은 글씨 연습을 처음 시켜보고 있는데, 어느 날부터 부쩍 재미있어하며 글쓰기를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글도, 영어도 곧잘 따라 쓰고 있어 칭찬을 많이 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나씩 배우고 익혀 터득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마도 부모로서 가장 기쁘고 복된 순간인 듯 하다.
, 땀페레 시립 도서관에는 핀란드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토베 얀손(Tove Jansson)과 무민 이야기(Moomiin Stories)에 헌정된 박물관이 있어 그 사이 선재를 데리고 두 번 다녀왔다. 무민은 참 사랑스러운 동화인데,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연친화적이고, 평화롭고, 가끔 엉뚱하고 기발한 핀란드 사람들 특유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잘 표현돼 있는 것 같다. 어린이들과 부모들의 일독을 권한다. 핀란드에 여행오시는 분들도 한 번 들러 보시길



선재의 글씨 연습


토베 얀손과 무민 이야기의 일러스트레이션

2012년 2월 25일 토요일

첫 겨울을 보내며 선재와 놀다

길었던 겨울이 갑니다.
추위와 어둠과 얼음의 세상은 이미 북상하기 시작했네요. 

지붕마다 길게 매달려있던 고드름이 다 녹고,
해가 날마다 두 뼘씩은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니까요! 핀란드에도 봄이 오고 있답니다!

가는 겨울이 아쉬웠는지 지난 주엔 온 가족이 한 차례씩  감기를 앓았습니다.
다음 주는 '스키 방학'이라 유치원도, 대학도 쉬어 갑니다.
우리의 봄 방학 같은 거겠지요.
계절의 순환에 맞춰 숨 고르고 갈 수  있어 고맙습니다.

오늘은 선재와 함께 눈썰매를 타고 놀았습니다.
그 동안 많이 못 놀아 준 것이 미안해 실컷 놀고 들어왔답니다.

동영상 몇 개 찍어봤습니다.
핀란드의 늦겨울 풍경을 함께 즐기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m9Qj-kUtmw4&feature=youtu.be

http://www.youtube.com/watch?v=MxMFxGs7USo&feature=youtu.be

http://www.youtube.com/watch?v=9DUY4I28wSA&feature=youtu.be







2012년 2월 15일 수요일

2012년, 핀란드 대통령 선거 이야기(4)

4. 

핀란드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났다. 사실, 지난 25일 결선 투표를 치렀으니 열흘이나 지났다. 글을 빨리 썼어야 하는데, 결과가 좀 싱거웠고 핀란드 사람들도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간 듯 워낙 차분한 분위기여서 김이 샌 느낌이었다. 게다가, 다음 달로 예정된 나의 박사논문 연구계획서 발표 준비를 하느라 한 주를 분주하게 보냈더니 벌써 215일이 돼 버렸다. 어젯밤부터 관련 기사들과 인터넷 자료들을 다시 훑어보고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결선 투표 결과 핀란드 사람들은 예상대로 보수당인 NCPSauli Niinistö 후보를 임기 6년의 새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Niinistö는 결선투표에서 62.6%의 득표를 올려 37.4%의 득표에 그친 녹색당의 Haavisto 후보를 여유있게 눌렀다. 이로써 1956Juho Kusti Passikivi 대통령이 물러난 이래 56년 만에 보수당 출신의 대통령이 배출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냉전 시대에 소련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던 핀란드는 외교 정책의 제약 때문에 보수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지금 NCP는 잔치 분위기다. 현재 보수당과 사민당, 스웨덴 인민당, 기독인민당, 좌파당, 녹색당 등 6개 정당이 연합하여 성립된 내각의 수상도 NCP의 젊은 정치인 Jyrki Katainen(1971년생)여서 NCP가 당분간 핀란드의 외교와 정치를 주도하게 됐다.(물론 핀란드는 합의적 의사결정 제도와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NCP가 독단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렵다.)



현 대통령 Halonen 부부와 당선자 Niinistö 부부가 대통령궁에서 회동하고 있다.


, Niinistö의 당선은 지난 30년 동안 사민당 정치인들이 연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해왔던 기록을 깨뜨렸다. 핀란드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 중 하나였던 현 Tarja Halonen도 사민당 출신이다. 2001년과 2006년 선거에서 승리하며 지난 12년간 핀란드 대통령으로 활동해온 그녀도 이번 달로 임기를 마무리한다. Niinistö31일부터 6년간의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Niinistö는 어떤 인물인가 살펴보자. 그는 1948824일 핀란드의 Salo 지방에서 태어났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변호사로서 법률회사를 이끌었다. 1987년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1994년에 보수당인 NCP의 당수로 선출됐다. 1995년부터 사민당이 주도한 연합 정부에 장관으로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하다가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재무 장관으로 활약했다.(2001년까지는 부총리를 겸했다.) 당시 핀란드는 1991년 소련 몰락 이후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은 뒤 기술혁신과 경제구조 개혁을 통해 새롭게 도약하던 시기였다. 원래 핀란드의 전통적인 삼림과 제지업이 중심 사업 분야였던 대기업 노키아가 정보통신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 이 때다. Niinistö는 재무 장관으로서 엄격한 재정 정책을 펼쳐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2003년 내각에서 물러난 뒤 유럽투자은행 이사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결선에 진출했으나 현 대통령인 Halonen에게 졌다. 그러나 지난 6년간 핀란드 사람들은 Niinistö를 다음 대통령으로 대기 중인 인물로 여겼다고 한다. 2002년부터는 유럽연합 차원의 보수당 계열 정당들의 연합체인 유럽인민당(European People’s Party, EPP)의 명예 의장으로 활동해 오고 있으며, 2007년부터 20114월까지 핀란드 의회 의장을 맡았다.

앞으로 Niinistö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여러 차례의 헌법 개정으로 핀란드의 대통령은 예전처럼 강력한 권한을 갖고서 일상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며, () EU 문제에 대한 외교정책을 주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핀란드 사회의 여론 형성자로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특별한 이슈들이 제기되지는 않았다. 다만, Niinistö와 보수당은 친EU 정책을 견지하고 있어 최근 유로존(Eurozone)의 위기 앞에서 고개를 드는 EU 회의론(EU Sceptical)을 차단하고 EU와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EU 내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민족주의 포퓰리즘 정당인 핀란드 사람들(the Finns)이 지난 해 실시된 총선(19.1%) 때에 비해 현저히 낮은 득표율(9.4%)에 그치고, 대선 후 실시된 정당 지지율 여론 조사(2.14.)에서도 지지율이 하락(16.5%)한 것으로 나타나 대선 후 지지율이 더 상승한 보수당(24.1%)의 친EU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밖에, 보수당은 NATO 가입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으나 이는 대다수 핀란드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는 사안이다. Niinistö 당선자도 이 사안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당선 연설에서 핀란드의 소외된 청소년들과 시골 지역에 대한 차별 해소와 통합적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역시 이번 핀란드 대선의 최대 화제는 최초의 동성애자 대통령 후보였던 녹색당의 Haavisto 후보의 첫 결선 진출이었다. 이는 핀란드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녹색당의 역사에서도 길이 기억될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Haavisto는 당초 낮은 지지도와 적은 선거자금으로 출발했으나 인권과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논쟁을 이끌었고, 특히 SNS에 기반한 선거운동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젊은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결국 2차 투표의 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그는 백만 명이 넘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향후 핀란드 정치의 방향과 녹색당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핀란드 사람들(the Finns)이 약진한 뒤 민족주의, 포퓰리즘, 불관용의 방향으로 빠져들던 핀란드의 정치와 시민사회의 물줄기를 반대로 돌려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선 이후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서도 녹색당은 계속 상승세(대선 전 7.6% 대선 후 9.6%)를 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 이후 Haavisto는 국회의원으로 돌아갔지만, 차기 대선 등 주요 정치 일정에서 그의 행보가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부터 주목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녹색당 창당 소식이 들려온다. 핀란드의 이번 사례가 이들의 의욕적인 발걸음에 좋은 참고점이 되리라 믿는다.
 
한편, 이번 대선은 사민당의 패배였다. 지난 30년간 대통령을 배출했던 정당이 이번에는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하였고, 1차 투표에서 사민당의 Paavo Lipponen 후보의 지지율 또한 최악(7%)을 기록했다. Lipponen 후보는 1995년부터 2003년까지 내각의 총리였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핀란드 의회 의장을 맡았던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패배는 뼈아프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선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사민당 지지율은 16.1%를 기록하여 거듭 추락하는 모양새다.
사민당 패배에 대한 몇 가지 요인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먼저 대선에서의 고전은 지난 30년 간 사민당 출신 대통령들의 연임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과 반발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 보수당이 주도하는 연립 내각에 참여하면서 당수인 Jutta Urpilainen(1975년생, 여성)이 재무 장관을 맡고 있는데, 이로 인해 사민당의 고유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동시에 경제적 위기에 대응하는, 대중적으로는 인기없는 재정 정책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핀란드 사회에서 사민당의 정치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의 위기는 그 결과가 불러온 역설적 어려움이라는 것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분석이다.(Guardian, 2012.2.2. “Finland's left has become a victim of its own success” 기사 참조)

주지하듯이, 핀란드는 북유럽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의 성공사례 중 하나이다. 보편적 소득 평등과 복지 서비스에 더해 특히, 교육의 우수성, 양성 평등, 삶의 질, 청렴도와 투명성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대다수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보수당도 감히 복지국가의 틀을 깨려고 하지 않으며, 민족주의 우파 포퓰리즘을 표방하는 핀란드 사람들(the Finns)조차 복지국가의 수호를 다짐하며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표를 끌어들이고 있다. 위 가디언의 기사는 보수당조차 자신들을 또 하나의 노동당a labour party’으로 자리매김하는 나라에서, 좌파들이 왜 필요할 것인가?”라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더해, 핀란드 사민당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의 요구와 정치적 지지기반인 국내 노동조합의 요구 사이에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가디언 기사는 지적한다. 또한, 60대가 당의 주류를 이루고, 노동조합과 연금생활자들의 기득 이익을 보호하는 늙은 정당의 이미지가 젊은 층에 퍼져있다. 그리스 등 남부 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법안이 계속 이어지자 대중들의 인내심은 한계를 드러냈고, 민족주의적 정서와 복지국가 수호를 결합시킨 포퓰리즘 정당으로 상당수 노동자들의 지지가 옮겨갔다. 물론 이는 핀란드 사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럽의 사민주의 세력, 특히 북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최근 북유럽 국가들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리더들이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의 Akersberga에서 모여 2030년 북유럽 모델의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앞으로 핀란드 사민당과 북유럽 모델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 핀란드 녹색당과 Haavisto 후보는 어떤 모습으로 핀란드 정치와 세계 정치에서 자신들의 발자국을 아로새길 것인가? 부유층과 대기업, 금융 자본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핀란드의 새 대통령 Niinistö는 현 대통령 Halonen처럼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의 정치와 그들의 미래를 함께 주목해보자.

헬싱키항에 위치한 대통령궁(왼쪽 아래). 특별한 경호시설 없이 플리마켓과 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