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5일 수요일

2012년, 핀란드 대통령 선거 이야기(4)

4. 

핀란드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났다. 사실, 지난 25일 결선 투표를 치렀으니 열흘이나 지났다. 글을 빨리 썼어야 하는데, 결과가 좀 싱거웠고 핀란드 사람들도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간 듯 워낙 차분한 분위기여서 김이 샌 느낌이었다. 게다가, 다음 달로 예정된 나의 박사논문 연구계획서 발표 준비를 하느라 한 주를 분주하게 보냈더니 벌써 215일이 돼 버렸다. 어젯밤부터 관련 기사들과 인터넷 자료들을 다시 훑어보고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결선 투표 결과 핀란드 사람들은 예상대로 보수당인 NCPSauli Niinistö 후보를 임기 6년의 새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Niinistö는 결선투표에서 62.6%의 득표를 올려 37.4%의 득표에 그친 녹색당의 Haavisto 후보를 여유있게 눌렀다. 이로써 1956Juho Kusti Passikivi 대통령이 물러난 이래 56년 만에 보수당 출신의 대통령이 배출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냉전 시대에 소련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던 핀란드는 외교 정책의 제약 때문에 보수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지금 NCP는 잔치 분위기다. 현재 보수당과 사민당, 스웨덴 인민당, 기독인민당, 좌파당, 녹색당 등 6개 정당이 연합하여 성립된 내각의 수상도 NCP의 젊은 정치인 Jyrki Katainen(1971년생)여서 NCP가 당분간 핀란드의 외교와 정치를 주도하게 됐다.(물론 핀란드는 합의적 의사결정 제도와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NCP가 독단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렵다.)



현 대통령 Halonen 부부와 당선자 Niinistö 부부가 대통령궁에서 회동하고 있다.


, Niinistö의 당선은 지난 30년 동안 사민당 정치인들이 연이어 대통령직을 수행해왔던 기록을 깨뜨렸다. 핀란드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 중 하나였던 현 Tarja Halonen도 사민당 출신이다. 2001년과 2006년 선거에서 승리하며 지난 12년간 핀란드 대통령으로 활동해온 그녀도 이번 달로 임기를 마무리한다. Niinistö31일부터 6년간의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Niinistö는 어떤 인물인가 살펴보자. 그는 1948824일 핀란드의 Salo 지방에서 태어났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는 변호사로서 법률회사를 이끌었다. 1987년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1994년에 보수당인 NCP의 당수로 선출됐다. 1995년부터 사민당이 주도한 연합 정부에 장관으로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법무부 장관직을 수행하다가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재무 장관으로 활약했다.(2001년까지는 부총리를 겸했다.) 당시 핀란드는 1991년 소련 몰락 이후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은 뒤 기술혁신과 경제구조 개혁을 통해 새롭게 도약하던 시기였다. 원래 핀란드의 전통적인 삼림과 제지업이 중심 사업 분야였던 대기업 노키아가 정보통신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 이 때다. Niinistö는 재무 장관으로서 엄격한 재정 정책을 펼쳐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2003년 내각에서 물러난 뒤 유럽투자은행 이사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2006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결선에 진출했으나 현 대통령인 Halonen에게 졌다. 그러나 지난 6년간 핀란드 사람들은 Niinistö를 다음 대통령으로 대기 중인 인물로 여겼다고 한다. 2002년부터는 유럽연합 차원의 보수당 계열 정당들의 연합체인 유럽인민당(European People’s Party, EPP)의 명예 의장으로 활동해 오고 있으며, 2007년부터 20114월까지 핀란드 의회 의장을 맡았다.

앞으로 Niinistö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여러 차례의 헌법 개정으로 핀란드의 대통령은 예전처럼 강력한 권한을 갖고서 일상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다만,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며, () EU 문제에 대한 외교정책을 주도한다. 그러나 여전히 핀란드 사회의 여론 형성자로서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특별한 이슈들이 제기되지는 않았다. 다만, Niinistö와 보수당은 친EU 정책을 견지하고 있어 최근 유로존(Eurozone)의 위기 앞에서 고개를 드는 EU 회의론(EU Sceptical)을 차단하고 EU와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EU 내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민족주의 포퓰리즘 정당인 핀란드 사람들(the Finns)이 지난 해 실시된 총선(19.1%) 때에 비해 현저히 낮은 득표율(9.4%)에 그치고, 대선 후 실시된 정당 지지율 여론 조사(2.14.)에서도 지지율이 하락(16.5%)한 것으로 나타나 대선 후 지지율이 더 상승한 보수당(24.1%)의 친EU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밖에, 보수당은 NATO 가입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으나 이는 대다수 핀란드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는 사안이다. Niinistö 당선자도 이 사안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당선 연설에서 핀란드의 소외된 청소년들과 시골 지역에 대한 차별 해소와 통합적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역시 이번 핀란드 대선의 최대 화제는 최초의 동성애자 대통령 후보였던 녹색당의 Haavisto 후보의 첫 결선 진출이었다. 이는 핀란드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녹색당의 역사에서도 길이 기억될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만하다. Haavisto는 당초 낮은 지지도와 적은 선거자금으로 출발했으나 인권과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논쟁을 이끌었고, 특히 SNS에 기반한 선거운동으로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젊은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결국 2차 투표의 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그는 백만 명이 넘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향후 핀란드 정치의 방향과 녹색당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핀란드 사람들(the Finns)이 약진한 뒤 민족주의, 포퓰리즘, 불관용의 방향으로 빠져들던 핀란드의 정치와 시민사회의 물줄기를 반대로 돌려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대선 이후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서도 녹색당은 계속 상승세(대선 전 7.6% 대선 후 9.6%)를 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선 이후 Haavisto는 국회의원으로 돌아갔지만, 차기 대선 등 주요 정치 일정에서 그의 행보가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부터 주목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녹색당 창당 소식이 들려온다. 핀란드의 이번 사례가 이들의 의욕적인 발걸음에 좋은 참고점이 되리라 믿는다.
 
한편, 이번 대선은 사민당의 패배였다. 지난 30년간 대통령을 배출했던 정당이 이번에는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하였고, 1차 투표에서 사민당의 Paavo Lipponen 후보의 지지율 또한 최악(7%)을 기록했다. Lipponen 후보는 1995년부터 2003년까지 내각의 총리였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핀란드 의회 의장을 맡았던 성공한 정치인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패배는 뼈아프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선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사민당 지지율은 16.1%를 기록하여 거듭 추락하는 모양새다.
사민당 패배에 대한 몇 가지 요인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먼저 대선에서의 고전은 지난 30년 간 사민당 출신 대통령들의 연임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과 반발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 보수당이 주도하는 연립 내각에 참여하면서 당수인 Jutta Urpilainen(1975년생, 여성)이 재무 장관을 맡고 있는데, 이로 인해 사민당의 고유한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동시에 경제적 위기에 대응하는, 대중적으로는 인기없는 재정 정책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동안 핀란드 사회에서 사민당의 정치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의 위기는 그 결과가 불러온 역설적 어려움이라는 것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분석이다.(Guardian, 2012.2.2. “Finland's left has become a victim of its own success” 기사 참조)

주지하듯이, 핀란드는 북유럽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 모델의 성공사례 중 하나이다. 보편적 소득 평등과 복지 서비스에 더해 특히, 교육의 우수성, 양성 평등, 삶의 질, 청렴도와 투명성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며, 대다수 유권자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보수당도 감히 복지국가의 틀을 깨려고 하지 않으며, 민족주의 우파 포퓰리즘을 표방하는 핀란드 사람들(the Finns)조차 복지국가의 수호를 다짐하며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표를 끌어들이고 있다. 위 가디언의 기사는 보수당조차 자신들을 또 하나의 노동당a labour party’으로 자리매김하는 나라에서, 좌파들이 왜 필요할 것인가?”라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에 더해, 핀란드 사민당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의 요구와 정치적 지지기반인 국내 노동조합의 요구 사이에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가디언 기사는 지적한다. 또한, 60대가 당의 주류를 이루고, 노동조합과 연금생활자들의 기득 이익을 보호하는 늙은 정당의 이미지가 젊은 층에 퍼져있다. 그리스 등 남부 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법안이 계속 이어지자 대중들의 인내심은 한계를 드러냈고, 민족주의적 정서와 복지국가 수호를 결합시킨 포퓰리즘 정당으로 상당수 노동자들의 지지가 옮겨갔다. 물론 이는 핀란드 사민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유럽의 사민주의 세력, 특히 북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최근 북유럽 국가들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노동조합 리더들이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의 Akersberga에서 모여 2030년 북유럽 모델의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앞으로 핀란드 사민당과 북유럽 모델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 핀란드 녹색당과 Haavisto 후보는 어떤 모습으로 핀란드 정치와 세계 정치에서 자신들의 발자국을 아로새길 것인가? 부유층과 대기업, 금융 자본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핀란드의 새 대통령 Niinistö는 현 대통령 Halonen처럼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지도자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 핀란드의 정치와 그들의 미래를 함께 주목해보자.

헬싱키항에 위치한 대통령궁(왼쪽 아래). 특별한 경호시설 없이 플리마켓과 면해있다.

댓글 1개:

  1. 핀란드와 북유럽 사민당의 내부 사정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분석한 탁견, 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