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3일 수요일

2. 뻬쩨르부르그와 레닌그라드 사이에서

 

- "2014년 여름, 러시아 썅뜨 뻬쩨르부르그 여행기"

 
 
(1) 핀란드 역에 도착하다
 
핀란드 역’(Финляндский вокзал, Finlyandsky vokzal)은 우리가 도착한 샹뜨 뻬쩨르부르그의 역 이름이다. 뻬쩨르부르그에는 두 개의 기차역이 있는데, 하나는 핀란드 헬싱키 방향으로 떠나는 핀란드 역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방향의 기차가 떠나는 모스크바 역이다. 특이하게도 두 역 사이엔 철로가 없이 단절돼 있고, 그 가운데로 네바(Neva) 강이 흘러 발틱 해의 핀란드 만에 닿는다. 네바 강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 있고, 이들이 한여름의 백야 시간대에 들어 올려지는 풍광이 큰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그 중 기차가 지나는 철로 다리는 없는 것이다. 모스크바와 헬싱키, 러시아와 유럽 문명은 그렇게 이어진 듯 단절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핀란드 역이란 기표가 우리 귀에도 친숙한 것은 러시아의 붉은 혁명가 레닌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 20세기 초반 차르와 그의 비밀경찰의 탄압을 피해 핀란드와 스웨덴을 거쳐 제네바, 파리, 런던, 취리히 등에 머물며 망명 활동을 벌이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귀국을 결심한다. 독일 정부의 지원으로 비밀 열차를 타고 독일을 통과한 뒤 배로 스웨덴까지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191733, 마침내 당시 개명된 페트로그라드(Petrograd, 피터의 도시라는 뜻의 뻬쩨르부르그를 독일식 이름에서 러시아식으로 고쳐 부른 것. 당시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 상태였다.)의 핀란드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모여든 군중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으로 활동을 재개한 그는 그해 10월 무장한 볼셰비키 당원들을 동원해,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혁명을 실현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쿠데타에 가까운 행위였고, 이후 러시아는 약 3년여의 내전 상태에 돌입한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한 레닌과 그의 정부는 이후 70년간 지속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고, 그 사이 수도는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그러나 거듭되는 암살 시도 와중에 가슴에 맞은 총상이 남긴 후유증으로 레닌의 건강은 악화됐고, 결국 1924124일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뻬제르부르그는 다시 레닌그라드(Leningrad, 레닌의 도시라는 뜻)로 이름을 바꾸었고,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히틀러의 나치 체제와 함께 20세기 최대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한다. 감시와 테러, 투옥과 고문, 집단학살과 강제이주로 점철된 전대미문의 공포의 시대가 전개되면서 수많은 러시아인들과 러시아에 거주하던 소수집단 및 외국인들, 그리고 소련 연방을 구성하던 소수민족들에게 행해졌다. (만주 북동부의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던 한인 공동체도 이때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돼 큰 희생을 치렀다.) 
 
테러의 시대이후 찾아온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소련은 비록 전승국에 속했지만 약 27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한,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국이었다.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약 900일 간 레닌그라드 봉쇄’(Leningrad Siege)를 단행했고, 이 때 레닌그라드는 인구의 절반이나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잃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나 자신, 여행을 앞두고 뻬쩨르부르그에 관한 책자들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면서 새삼 20세기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했던 러시아인들의 운명이 아프게 다가왔다. 20세기 세계사적 격변의 한 시발점이 된 그 핀란드 역에 나도 도착한 것인가, 잠시 감흥에 잠긴 채 기차에서 내렸다.
 
 
(2) 낯선 나라 러시아의 첫 인상
 
 
멀리 역사와 기차를 배경으로 선재의 사진을 한 장 찍고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니 곧장 거리가 나타났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 도로 옆으로 주차되어 있는 차량들, 길 건너 낡은 버스 정류장, 낯선 러시아어 간판들과 안내 표지들, 직선적이고 획일적인 소련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느냐고 달라붙는 택시 기사를 뿌리치고 바지 속의 지갑과 휴대폰에 신경쓰며 빠른 걸음을 했다. 예상했던 것과 아주 다른 풍경 앞에서 어디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가늠이 쉽질 않았다. 택시를 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고, 거리 위로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건물의 긴 블록을 왼쪽으로 끼고 도니 핀란드 역의 정면과 광장이 나타났다. 인도에 주변지도가 새겨진 안내판이 서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작은 대합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렵사리 ‘i’ 표시를 발견하고 창구엘 가서 호텔 주소를 보여주며 가는 방법을 물었다. 그런데 아뿔싸, 창구에 앉은 노년의 여성은 영어가 되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위한 안내센터가 아니라 일반 러시아 승객들을 위한 안내소였던 모양이다. 어쩌랴, 몸 언어를 활용해 소통을 시도했더니 지도 한 장 내주지 않으면서 손짓으로 길을 건너가 메트로를 타라고 했다. 낭패였다.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장소라 당연히 여행 안내센터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거기서 지도와 교통은 물론 주요 여행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영문 가이드북조차 집에 두고 온 터였다.
 
그나마 여행오기 전에 러시아어 알파벳과 발음을 익히고 온 것이 큰 다행이었다. 거리의 간판과 지명을 띄엄띄엄이나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이 이리 된 것, 몸으로 부딪쳐야겠다 싶었다. 역 바깥으로 나온 뒤 주변지도 판을 다시 살펴보면서 아내와 상의를 했다. 본래는 인포센터를 들러 트래블 카드를 사고 현지 여행 정보를 얻은 뒤 호텔로 갈 계획이었는데, 일단 역 광장에 유명한 레닌 동상이 있으니 그걸 보고 호텔을 빨리 찾아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길을 건너 광장으로 갔다. 붉은 색의 작은 트램들이 교차로를 돌고 있었다. 80년대부터 운행했을 법한 트램의 색은 하얗게 바래 있었다. 움직일 때는 덜컹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광장 주변으로 경찰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교차로에서 교통을 정돈하는 하늘색 제복의 경찰들만이 아니라 광장과 거리 군데군데 서 있거나 천천히 배회하는 짙은 군청색 제복의 경찰들이 있었다.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다기보다 그저 건달처럼 둘씩 서서 잡담하거나 지나가는 시민들을 관찰하는 것이 업무인 것처럼 보였다. 21세기의 러시아는 여전히 경찰국가인 것인가,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실제로 우리 앞에서 나이든 아버지와 함께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가던 서양 젊은이가 검문에 걸렸다. 시무룩한 표정의 젊은 경찰이 밝은 상의에 반바지 차림의 그를 붙들고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을 마주쳤다. 약간 당황한 듯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여권을 꺼내던 청년의 얼굴을 지나쳐 우리는 광장으로 들어갔다.
 
 
(3) 레닌 동상 앞에서의 상념
 
화사한 인공 꽃밭과 대형 분수대를 지나니 멀리 네바 강이 보이고, 그 앞으로 큰 청동조각 위에 한 사내가 강 건너편을 향해 오른 팔을 쭉 뻗은 채 서있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약간 대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양복 재킷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무장한 차량 위에 올라가 우뚝 서 연설하는 그는, 레닌이었다. 그 뒤로 핀란드스키 레일웨이 스태이션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보니 동상의 허릿춤에 모자가 찔러 넣어진 것이 보였다. 번뜩이는 천재와 강철같이 단호한 의지를 겸비한 당대의 혁명가다운 형상이었다. 19172월 혁명 직후에 핀란드 역에 도착해 긴 여행의 피곤함을 잊고 군중들 앞에서 포효했을 레닌의 모습이 그대로 연상됐다.
 
어느덧 그로부터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가 수립한 소비에트 공화국은 혁명의 이상을 배반한 채 테러와 독재, 무능과 부패의 상징이 되어 무너졌고,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선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한 러시아는 KGB 출신으로 신흥재벌 올리가르히(Oligarch)를 대표하는 인물과 그의 친구들이 새로운 영구지배를 꿈꾸는 정치체제가 되어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푸틴과 그 측근들이 샹뜨 뻬쩨르부르그 출신이라는 것이다.
 
만약 레닌이 총상의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달라졌을까? 그의 사상이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적 요소들을 진지하게 수용했더라면, 종교와 예술과 인류의 문화적 삶의 양식에 대해 덜 폭력적이고 포용적 관점을 취했더라면 사태가 달라졌을까? 새로운 세기, 러시아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소련 몰락 이후 23년이 흘렀지만 아직 핀란드 역 앞에 건재하게 서 있는 레닌의 동상을 보면서 두서없는 생각들이 구름처럼 일었다.
 
, 한 가지 이야기가 남았다. 이 레닌 동상은 지난 2009년 어느 봄날 새벽에 누군가 설치한 사제폭탄이 터져 허리 뒷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사건을 겪었다. 지금 동상은 2010년 레닌 생일에 다시 원상 복원된 것이라 한다. 문화적 반달리즘(vandalism)의 표출로 비난받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다른 한편 레닌으로부터 비롯돼 스탈린의 전체주의 체제로 귀결된 소비에트 시절의 유산에 대해 지긋지긋해 했을 많은 이름없는 러시아 시민들의 원성도 귀에 들려오는 듯 하다. 책을 보니, 뻬쩨르부르그 시내 모스크바 광장에 있는 레닌 동상은 이미 소비에트 시절부터 경찰의 눈을 피해 지속적으로 어떤 무명씨들에 의해 양쪽 눈알이 번갈아 파내지는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당국이 복원해놓아도 소용이 없어 금세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됐다고...
 
 



 

2014년 7월 22일 화요일

2014년 여름, 러시아 샹뜨 뻬쩨르부르그(St Petersburg) 여행기

 
1. ‘핀란드 역으로’: 기차를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다
 
2014712일부터 15일까지 34일 일정으로 샹뜨 뻬쩨르부르그 여행을 다녀왔다. 여름 방학을 맞아 아내랑 선재와 더불어 가족여행을 떠난 것.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옆 나라 러시아의 역사적 도시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그 동안 주로 여행한 나라들이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어서 이번에는 동쪽으로 한 번 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이면 국경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었는데, 20세기의 혁명가 레닌이 이 기찻길을 이용해 핀란드로 망명했고, 나중에 다시 기차로 귀국해 혁명을 이끌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품어내는 여행의 낭만’(?)이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국민시인 쁘슈낀과 <죄와 벌>의 작가 도스또예쁘스끼 문학의 산실이 아닌가!
 
인터넷으로 기차표를 알아보고, 우리가 묵을 호텔을 예약한 뒤 짐을 꾸려 712일 토요일 새벽 437분 기차를 탔다. 오전 느긋한 시간과 오후에 떠나는 기차는 가격이 두세 배 이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새벽 기차를 타야했다. 전날 늦게 잠든 선재를 새벽 3시 반에 깨워 간단히 옷만 입힌 뒤 집을 나섰다. 선재는 졸려하면서도 잘 일어나 씩씩하게 길을 걷는다. 백야의 땀뻬레, ‘일마린까뚜’(Ilmarinkatu)의 아파트들과 그 너머 키 큰 자작나무들 위로 다시 동이 트고 바람이 시원했다. 차 없는 거리에 자전거를 탄 사람들만 간간히 지나쳤다. 역까지는 걸어서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에 도착하니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핀란드 북쪽에서부터 밤새 달려온 기차 안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다양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의 기대감 탓인지, 갈아타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우리는 기차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지나는 호수에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여름 하늘은 상쾌했고, 대지는 푸르게 출렁였다. 붉은 적갈토 색깔의 시골집들이 단정하고 깨끗한 얼굴을 하고 서 있다. 50분쯤 달리자 푸른 나무 벽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성, 하멘린나(Hämeenlinna)가 호수에 떠 있는 듯, 가라앉은 듯 신비롭게 나타났다. 553분에 첫 번째 경유지 리히마끼(Riihimäki)에서 내렸다. 역사 바깥을 잠깐 나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통근 열차로 갈아타고 라흐띠(Lahti)에 내리니 654. 플랫폼에는 우리와 같은 승객들이 제법 많았다.
 
아침 72, 헬싱끼에서 출발해 삐에따리(Pietari, 뻬쩨르부르그의 핀란드 이름)로 가는 기차가 들어왔다. 우리 자리를 찾아 가방을 짐칸에 올리고 앉으니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방송은 핀란드어, 러시아어, 영어로 계속됐다. 기차가 국경을 넘기 전에 출입국 경찰의 체크가 있으니 미리 러시아 입국 카드를 작성하라고 했다.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 여권번호 등을 적은 뒤 여행 목적과 행선지 주소 혹은 호텔 이름을 두 장씩 기재하도록 돼 있었다. 승무원이 나눠준 카드를 작성했다. 객차 안에서 두 사람이 돌아다니며 유로와 루블화를 환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전날 땀뻬레 시내의 Nordea 은행에 들러 루블화를 환전했는데, 기차 안이 훨씬 싸고 수수료도 적은 듯 했다. 첫 번째 러시아 여행의 수업료인 셈 쳤다. 얼마 뒤 세관원이 지나다니며 관세 신고할 것이 있는지 점검했다. 신고할 아무 것도 없다고 하니 가방이 어딨냐고 물었다. 짐칸에 있는 작은 가방 하나와 백팩 2개가 전부라고 하니 무사 통과.
 
그 사이 기차는 계속 러시아 국경을 향해 달렸다. 핀란드 어디나 울창한 숲과 호수가 번갈아 나타나는 비슷한 풍광이지만, 기차가 동쪽으로 달리자 약간 언덕진 구릉들이 많이 보였다. 여름 하늘은 광활하고 숲은 더 깊어지는 듯 했다. 2시간 만에 꼬우볼라(Kouvola), 그리고 핀란드 쪽의 마지막 역인 바이니깔라(Vainikala)를 지났다. 국경을 넘기 전에 핀란드의 국경 관리 경찰이 다니면서 출국 심사를 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도장에는 출국 날짜와 함께 유럽연합(EU) 국가 핀란드의 표시와 함께 기차 문양이 새겨져있다. 국경을 넘자 이번에는 러시아의 국경 관리 요원들이 다니면서 입국 심사를 했다. 여권과 입국 카드를 보여주고, 영어로 몇 가지 문답을 했다. 그녀는 잠이든 선재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여권을 휴대용 전자기기에 대고 문지른 뒤, 다시 여권 공란에 입국 허가 도장을 찍어주었다. 출입국 심사관 특유의 관료적 표정이던 그녀는 잠시 뒤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입국 카드를 잘못 가져갔다며 한 장을 바꿔서 돌려주었다. 나의 실수였나 했더니 자기 잘못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고, 우리는 서로 웃으며 인사했다. 제복 안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인간적 표정을 잠시 만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핀란드와 러시아 혹은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경계를 넘었다.
 
국경 너머의 첫 러시아 역은 뷔보르그(Vyvorg). 핀란드어로 비뿌리(Viipuri)라 불리는 이곳은 13세기 이래 스웨덴 지배 하 핀란드령에 속했으나 18세기 초반 피터 대제에 의해 러시아 영토에 편입됐다. 다시 1809년 러시아 차르 치하의 핀란드 대공국 소속으로 변경된 뒤 1917년 독립 후에는 그대로 핀란드 영토가 됐는데, 한 때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핀란드와 소련의 두 차례 전쟁 끝에 다시 소련의 영토로 편입됐다. 이 때 핀란드는 영토의 약 20 퍼센트를 잃었고, 뷔보르그를 포함한 동쪽 까렐리아 지방의 주민 수십만 명이 집과 땅을 잃고 서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작년에 수강했던 핀란드어 코스의 선생님 한 분도 이 때 부모와 가족들이 까렐리아에서 땀뻬레 근처로 이주해왔다고 했다. 스웨덴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입양된 어린이들도 많아 이들의 스토리가 지금도 TV 다큐멘타리 등에서 자주 등장한다. 뷔보르그는 그렇게 러시아와 핀란드 관계사의 변천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영토로만 남아 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무거운 가방을 끌거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역사를 빠져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기차가 국경을 넘으니 풍광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숲과 호수와 도시가 이어지는 것은 비슷한데 숲은 핀란드 쪽보다 조림이 어수선했고, 황무지같은 언덕들이 자주 나타났다. 철로 주변의 아파트와 건물들은 대개 낡고 지저분한 차림새였다.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차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고, 붉은 색과 회색을 나란히 칠한 러시아 열차들도 보였다. 공간의 변화와 함께 시간의 변화도 함께 일어나는 양, 핀란드와는 왠지 확연히 다른 사회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면서 약간의 긴장이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짓 더 가자 대도시 주변의 풍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핀란드와 한 시간의 시차를 두고 러시아 시각으로 오전 1048, 기차는 삐에따리, 아니 샹뜨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고 있었다.
 
 
 


 






 



 
 

2014년 5월 30일 금요일

2016년 4월 16일, 잊지 않기 위하여


 
1.
 
안녕하세요? 쓰고 보니, 습관적으로 나온 인사말이군요. 정정합니다. 다들 어찌 사시는지요? 물론 안녕하지 못하시리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핀란드에 나와 있는 저도 통 안녕하질 못합니다세월호 참사 이후 여태 마음이 괴롭고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슬픔과 분노와 무기력이 번갈아 찾아와 사람을 괴롭혀 참 힘듭니다. 무엇보다 가슴 깊은 곳에 큰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그럭저럭 연구실을 나가고 인터뷰를 다니며 일상을 영위하고 있습니다만, 삶의 에너지가 점점 말라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다보니 침묵이 길었습니다. 블로그도 페이스북도 한 동안 쳐다보기조차 싫어졌습니다. 교묘한 말들과 용서할 수 없는 망언들이 판을 치는 한국의 언론 풍토에 한 마디도 더 얹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기막힌 사건을 대하고 보니 그냥 말이 끊어진 모양입니다. 사고 직후 몇몇 핀란드 동료들이 건네는 위로 인사에도 저 자신이 먼저 참담하고 부끄러워 금방 대화를 피하고픈 심정이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누구에게 속 시원히 말도 못하고, 그저 혼자서 저 또한 세월호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습니다.

 
 
2.
  
탐욕에 눈 먼 자들이 공동체의 키를 조종하고, 그러다 대형사고가 나도 철저하게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하고, 상상을 초월하게 무능한 정부는 진실을 감춘 채 언론을 통제하는 데는 저리도 능하고, 정치인들과 지도층이란 자들의 망언이 끊이질 않고, 그런데도 다가오는 선거에서 저들은 자기들이 다시 권력을 쥐어야겠다며 악다구니를 쓰는... 그 사이로 하나둘 떠오르는 공모와 조작과 통제의 사악한 의혹들... 이토록 철저히 망가진, 그럼에도 아직 더 망가질 구석이 많아 보이는 이 나라가 정녕 내가 속한 리퍼블릭이란 말입니까?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이미 언론과 지식인들이 많은 진단과 처방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급하게 이 사건을 규정하기보다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조사해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점에서 유가족 대책위원회의 요구와 입장을 명확히 지지합니다. 지금처럼 망가진 한국에서라면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특히, 난데없이 불거져 나온 국정원 개입 의혹이 말 그대로 한 점 의혹없이 밝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김기춘, 갈 데까지 가보자’, 금수원의 구원파가 내걸었다는 현수막의 문구도 결코 단순한 비유와 상징이 아닐 것만 같습니다.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의 폐해, 정부 민영화와 관피아현상이 야기하는 문제점, 박근혜 정부의 언론 통제와 언론사들의 순응 및 취재윤리 실종, 계속되는 안전사고와 위험사회 증후군 등도 반드시 짚고 바로잡아야할 중요한 문제들이나, 세월호 참사가 사고였는지 사건이었는지 여부는 그 모든 쟁점을 뛰어넘어 최우선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긴밀하게 연결된 사건이겠지만요.)
 
그러나 과연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국회 특위 구성이 우여곡절 끝에 합의되었지만 지난 국정원 특위처럼 새누리당의 물타기작전과 증인과 조사대상기관들의 사보타지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해보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300명이 넘는 무고한 희생자들이 눈을 채 감지 못하고 있고, 선원들과 선주의 책임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헌법적 책임이 엄중하게 저들을 압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세월호 사건과 희생된 우리 아이들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는 유가족 대변인의 호소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늦었지만 저 또한 스스로 다짐합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3.
  
지난 40여 일간 긴 번민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계속 붙잡고 있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 핀란드 유학길에 오른 지 어느새 2년 반이 흘러갔습니다. 갓 여섯 살이었던 선재는 지난 해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오늘 핀란드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삼십대 후반이었던 저는 40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들게 핀란드어를 공부하고 연구계획을 궤도에 올려놓은 뒤 이번 학기 한참 달려가고 있지만, 이 머나먼 나라 핀란드에서 지금 내가 하는 공부가 도대체 한국 사회에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갑자기 큰 회의를 느꼈습니다. 너무나 동떨어진 정치사회의 수준을 앞에 놓고, 짐짓 21세기 핀란드 의회의 개혁과 민주적 혁신을 논하는 것이 참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한 건강한 자부심, 그 최소한의 근거마저 모두 바닷물 속으로 수장된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기성세대의 나이가 되어버렸는데,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 책임에서 나 또한 피해갈 수 없다는 자책에 또 괴로웠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도달한 한 가지 결심은 이것입니다. 앞으로 무너진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가꾸는데 기여하겠다고. 그것이 무엇이든, 제가 헌신할 분야와 일을 찾아 10, 20년 끝까지 책임과 역량을 다하겠다고. 무엇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교육을 바꾸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근원적인 성찰과 혁신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고 연대하겠다고.
 
 
4.
 
자식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이겨내며 다시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계신 유가족 분들께 큰 절을 올립니다. 거리에서, 해외에서 동료 시민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 밤마다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모든 시민들께도 마음을 보탭니다. 세월호 사건과 희생된 분들의 넋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2014년 4월 2일 수요일

핀란드 국가인권행동계획 세미나 참관기

[2014. 4. 2. 기자협회보 칼럼]

3월의 마지막 날, 핀란드 법무부와 의회 인권센터, 내가 유학 중인 땀뻬레(Tampere) 대학교가 공동 주최한 인권 세미나에 참석차 헬싱키에 있는 의회를 다녀왔다.

세미나에서는 2012년 4월, 현 정부가 채택한 핀란드의 첫 국가인권행동계획(2012~2013)에 관한 평가보고서가 발표됐다. 땀뻬레대 공법학과 연구팀이 작성한 평가보고서는 행동계획이 핀란드의 국가 인권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특히 정부와 시민사회가 협력해 국가인권정책을 발전시킨 점을 높이 평가했다. 보고서는 아울러 1차 행동계획에 인권정책의 우선순위가 명시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면서 정부 프로그램 및 예산과 면밀하게 연계된 행동계획의 수립을 제안했다. 나아가, 다소 산재돼 있고 자원이 불충분한 국가인권체계를 강화할 필요성도 제시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한국도 2007년부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이 수립, 시행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핀란드의 인권정책 논의가 반드시 빠르고 앞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 우리의 경우처럼 구조적 인권 침해와 차별적 실태가 만연한 현실에서 형식적 정책 체계의 수립 자체가 인권의 실현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세미나는 내게 핀란드에서 인권 정책과 담론이 발전해온 역사적 과정을 짚어볼 수 있게 했다.

사실 핀란드에서도 인권 정책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현상이다. 물론 북유럽 국가로서 핀란드에도 사민주의적 평등과 연대, 시민적 자유의 전통이 시민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러나 냉전 시기 핀란드는 소련의 간섭과 제약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교적 중립정책을 고수했고, 이는 국제인권 이슈에도 적용됐다. 1975년의 헬싱키 평화협약은 동서 갈등에 끼인 핀란드의 지정학적 곤란을 역으로 활용해 적극적 국제외교 전략을 구사한 결과였다.

핀란드가 국제인권 레짐에 본격 합류한 것은 1990년대다. 소련의 붕괴로 핀란드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와 유럽인권협약(ECHR)에 가입할 수 있었고, 나아가 1995년부터 EU 회원국이 됐다. 같은 해 핀란드는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유럽인권협약에 맞춰 전면 개정했고, 그 연장에서 2000년 헌법의 전면 개정을 단행했다. 이 시기 핀란드는 EU 의장국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국제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인권, 양성평등, 국제원조, 평화중재 등의 의제를 선도하며 인권 국가로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여전히 외무부의 외교 전략의 일부처럼 인식되던 인권 의제가 핀란드 정부의 정책 형성에 중심 이슈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이후다. 2002년부터 학교 교육에서 인권교육이 대폭 강화됐고, 2007년부터 정부 프로그램의 주목표로 인권실현의 촉진이 포함됐다. 2011년 임기를 시작한 현 정부는 국가인권행동계획을 채택하기로 의회에 보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권은 핀란드 정책형성 회로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공간 이동했다.

이번 세미나에는 핀란드의 전 대통령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과 전 의회 옴부즈맨 리따-레나 빠우니오(Riitta-Leena Paunio), 의회 헌법위원장 요한네스 꼬스끼넨(Johannnes Koskinen)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특히, 인상적인 사람은 할로넨 대통령이었다. 비서도 없이 소박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단순한 축사가 아니라 풍부한 경륜에 바탕한 구체적 논평을 제공했다. 국가 권력과 시민 간의 관계가 수평적이고 가까운 북유럽 민주주의의 한 단면이다.

할로넨 대통령의 이력도 참 흥미롭다. 헬싱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할로넨은 학생운동을 거쳐 1971년 사민당에 가입했고, 1970년부터 핀란드 노총(SAK)의 변호사로 일했다. 70년대 후반 헬싱키 시의회와 핀란드 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1980~81년에는 핀란드 동성애 단체(SETA)의 대표를 역임했다. 보건복지장관(1987~90), 법무장관(1990~91), 외무장관(1995~2000)으로 활약한 뒤 2000년 핀란드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돼 2012년까지 연임하며 인권 외교와 성평등에 앞장섰다.

높은 대중적 지지와 국제적 명성을 누렸던 그녀는 퇴임 후에도 인권, 민주주의, 시민사회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녀의 인생 역정에서도 우리는 핀란드의 인권 정책과 문화가 발전해온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1부 세미나에서  평가보고서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있는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 대통령.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의회와 내각의 요직을 거쳐 대통령까지 지낸 그녀는 현대 핀란드의 양성평등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지금도 대중적 인기가 높다. 2002년과 2006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고(故)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회담한 일이 있다.

2부 세미나의 패널 토론. 의회 헌법위원장 요한네스 꼬스끼넨과 의회 인권센터 소장 끄리스띠나 꼬우로스(Kristiina Kouros) 등이 앉아 있다. 사회자는 내가 속한 땀뻬레대 정치학과의 전임 강사 따르야 세빠(Tarja Seppä)로 국제인권 전문가이다.

의회 인권센터 소장 끄리스띠나 꼬우로스(Kristiina Kouros)가 인권 정책과 담론의 다양한 층위와 실현 양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에는 국가인권기구가 의회 옴부즈맨 산하의 인권센터 형태로 설치돼 있다. 시민들의 진정에 대한 조사와 구제는 옴부즈맨이 직접 담당하고, 인권센터는 주로 인권 정책, 연구, 교육, 협력 기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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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아이슬란드 재발견 (2): 금융 위기 이후 아이슬란드의 도전과 혁신

2014. 2. 26. <기자협회보> 글로벌리포트/ 북유럽
 
아이슬란드는 최근 전 지구적 기후 변화, 국제안보 환경의 변화, 인터넷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 등 현대적 도전들에 대해 적극 대응하고 있다.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14년 1/2월호에 실린 아이슬란드 대통령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Olafur Ragnar Grimsson)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모습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최근 기후 변화와 북극권 개발이 큰 이슈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혹독한 기후 조건과 국제적 고립에 시달렸던 아이슬란드가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까지 개발 이익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 사안에 대해 아이슬란드는 일찌감치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북극이사회(The Arctic Council)’ 등 협력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평화·생태적 방향으로 북극권 개발이 이루어지도록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지열 등 친환경 에너지를 잘 활용해온 경험과 전문성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둘째, 아이슬란드는 군대가 없는 나라로 평화 국가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냉전 시대 미·소의 중간에 놓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NATO의 회원국이면서 미국의 군사기지로 이용됐던 아이슬란드는 많은 핵무기가 배치돼 있던 세계적 군사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국제안보 환경이 변화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벌였던 미 부시 정부가 2006년 아이슬란드 미군 기지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본래부터 자국 군대가 없던 아이슬란드는 ‘한 명도 무기를 든 사람이 없는’ 완전한 비무장 국가가 되었다. 올라푸르 대통령은 말한다. “전통적인 관념과는 반대로, 아무런 군사적 요소 없이도 러시아, 미국, 캐나다, 북유럽 국가들, 중국, 인도, 프랑스, 독일 등과 폭넓은 국제관계를 맺고 높은 수준의 외교활동을 통해 성공적인 국가를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셋째, 인터넷 정보 사회의 도래 속에서 아이슬란드는 정보와 언론의 자유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설립자들이 아이슬란드에 머물고 있고, 지난해 미국 정보기구 NSA의 불법적 정보 수집을 폭로했던 스노든이 애초 망명을 희망했던 곳도 아이슬란드였다. 2010년 6월, 아이슬란드 의회는 세계 각국의 진보적 법률들을 참고해 ‘아이슬란드 현대 미디어 발의(Icelandic Modern Media Initiative, IMMI)’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발의는 아이슬란드를 정부 당국들로부터 정보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고,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공개를 감행하는 저널리스트들과 출판가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보호를 제공하는 미디어 천국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최근 아이슬란드 의회에도 진출한 해적당(The Pirate Party)의 욘스도띠르(Birgitta Jonsdottir) 의원이 주도했다.

한편, 2008년 금융 위기 직후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아이슬란드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헌법 개정 논의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 큰 폭의 시민 참여와 민주적 혁신 프로세스가 가동됐다. 당시 위기를 초래한 정부와 정책결정권자들에 분노한 시민들은 의회와 중앙은행 등에 몰려가 대규모 항의 집회를 벌였다. 심각한 폭력 사태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위기 직후의 아이슬란드는 정치적 시스템과 의사결정 과정 전반에 대한 시민 불신이 아주 높은 상태였다. 총리와 중앙은행장의 사퇴, 조기총선을 통한 새 내각의 구성을 이끌어낸 시민들의 정치적 에너지는 결국 헌법의 전면 개정 요구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단지 개별 정부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아이슬란드 사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2009년 11월, 풀뿌리 시민조직들의 발의로 새 헌법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민의회가 구성됐고, 얼마 후 정부도 일반 시민 대표들로 구성된 ‘헌법위원회’를 설립했다. 수개월에 걸친 숙의, 토론, 표결, 온라인 포럼과 SNS 피드백 등 광범위한 시민 참여 과정을 통해 헌법 초안이 성안됐다. 비록 최종 단계에서 보수정당들과 엘리트 세력의 벽에 막혀 새 헌법 제정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일반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숙의를 통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고자 했던 이른바 집단지성의 민주주의(crowdsourcing for democracy) 실험은 세계시민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다.

북유럽의 변방이자 북대서양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아이슬란드. 경제위기를 딛고 다양한 안팎의 도전에 맞서 혁신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는 이 나라와 그 시민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기자협회보] 칼럼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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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일 일요일

2014년 갑오해 설을 보내며

인사가 늦었습니다. 설 잘 쇠셨는지요?

저희는 조용히 떡국 한 그릇 먹고 부모님께 전화 드리며 보냈습니다. 선재도 한국서 가져온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한 뒤 세뱃돈 10유로를 받았는데요. 한복 입은 모습이 어여쁘고 대견해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마지막 것은 선재 돐 때 찍은 사진인데 한복이 같은 디자인이라 '그새 많이 컸구나', 더욱 실감했다는..^^

갑오년 청마해 힘차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