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22일 화요일

2014년 여름, 러시아 샹뜨 뻬쩨르부르그(St Petersburg) 여행기

 
1. ‘핀란드 역으로’: 기차를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다
 
2014712일부터 15일까지 34일 일정으로 샹뜨 뻬쩨르부르그 여행을 다녀왔다. 여름 방학을 맞아 아내랑 선재와 더불어 가족여행을 떠난 것.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핀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옆 나라 러시아의 역사적 도시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쩌다보니 그 동안 주로 여행한 나라들이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어서 이번에는 동쪽으로 한 번 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기차를 타고 몇 시간이면 국경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은 큰 매력이었는데, 20세기의 혁명가 레닌이 이 기찻길을 이용해 핀란드로 망명했고, 나중에 다시 기차로 귀국해 혁명을 이끌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품어내는 여행의 낭만’(?)이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국민시인 쁘슈낀과 <죄와 벌>의 작가 도스또예쁘스끼 문학의 산실이 아닌가!
 
인터넷으로 기차표를 알아보고, 우리가 묵을 호텔을 예약한 뒤 짐을 꾸려 712일 토요일 새벽 437분 기차를 탔다. 오전 느긋한 시간과 오후에 떠나는 기차는 가격이 두세 배 이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새벽 기차를 타야했다. 전날 늦게 잠든 선재를 새벽 3시 반에 깨워 간단히 옷만 입힌 뒤 집을 나섰다. 선재는 졸려하면서도 잘 일어나 씩씩하게 길을 걷는다. 백야의 땀뻬레, ‘일마린까뚜’(Ilmarinkatu)의 아파트들과 그 너머 키 큰 자작나무들 위로 다시 동이 트고 바람이 시원했다. 차 없는 거리에 자전거를 탄 사람들만 간간히 지나쳤다. 역까지는 걸어서 1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에 도착하니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핀란드 북쪽에서부터 밤새 달려온 기차 안에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다양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의 기대감 탓인지, 갈아타야 하는 부담 때문인지 우리는 기차에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차창 너머로 지나는 호수에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여름 하늘은 상쾌했고, 대지는 푸르게 출렁였다. 붉은 적갈토 색깔의 시골집들이 단정하고 깨끗한 얼굴을 하고 서 있다. 50분쯤 달리자 푸른 나무 벽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성, 하멘린나(Hämeenlinna)가 호수에 떠 있는 듯, 가라앉은 듯 신비롭게 나타났다. 553분에 첫 번째 경유지 리히마끼(Riihimäki)에서 내렸다. 역사 바깥을 잠깐 나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통근 열차로 갈아타고 라흐띠(Lahti)에 내리니 654. 플랫폼에는 우리와 같은 승객들이 제법 많았다.
 
아침 72, 헬싱끼에서 출발해 삐에따리(Pietari, 뻬쩨르부르그의 핀란드 이름)로 가는 기차가 들어왔다. 우리 자리를 찾아 가방을 짐칸에 올리고 앉으니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방송은 핀란드어, 러시아어, 영어로 계속됐다. 기차가 국경을 넘기 전에 출입국 경찰의 체크가 있으니 미리 러시아 입국 카드를 작성하라고 했다.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 여권번호 등을 적은 뒤 여행 목적과 행선지 주소 혹은 호텔 이름을 두 장씩 기재하도록 돼 있었다. 승무원이 나눠준 카드를 작성했다. 객차 안에서 두 사람이 돌아다니며 유로와 루블화를 환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전날 땀뻬레 시내의 Nordea 은행에 들러 루블화를 환전했는데, 기차 안이 훨씬 싸고 수수료도 적은 듯 했다. 첫 번째 러시아 여행의 수업료인 셈 쳤다. 얼마 뒤 세관원이 지나다니며 관세 신고할 것이 있는지 점검했다. 신고할 아무 것도 없다고 하니 가방이 어딨냐고 물었다. 짐칸에 있는 작은 가방 하나와 백팩 2개가 전부라고 하니 무사 통과.
 
그 사이 기차는 계속 러시아 국경을 향해 달렸다. 핀란드 어디나 울창한 숲과 호수가 번갈아 나타나는 비슷한 풍광이지만, 기차가 동쪽으로 달리자 약간 언덕진 구릉들이 많이 보였다. 여름 하늘은 광활하고 숲은 더 깊어지는 듯 했다. 2시간 만에 꼬우볼라(Kouvola), 그리고 핀란드 쪽의 마지막 역인 바이니깔라(Vainikala)를 지났다. 국경을 넘기 전에 핀란드의 국경 관리 경찰이 다니면서 출국 심사를 하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도장에는 출국 날짜와 함께 유럽연합(EU) 국가 핀란드의 표시와 함께 기차 문양이 새겨져있다. 국경을 넘자 이번에는 러시아의 국경 관리 요원들이 다니면서 입국 심사를 했다. 여권과 입국 카드를 보여주고, 영어로 몇 가지 문답을 했다. 그녀는 잠이든 선재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여권을 휴대용 전자기기에 대고 문지른 뒤, 다시 여권 공란에 입국 허가 도장을 찍어주었다. 출입국 심사관 특유의 관료적 표정이던 그녀는 잠시 뒤 다시 돌아와 자신이 입국 카드를 잘못 가져갔다며 한 장을 바꿔서 돌려주었다. 나의 실수였나 했더니 자기 잘못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고, 우리는 서로 웃으며 인사했다. 제복 안에 감춰져 있던 그녀의 인간적 표정을 잠시 만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핀란드와 러시아 혹은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경계를 넘었다.
 
국경 너머의 첫 러시아 역은 뷔보르그(Vyvorg). 핀란드어로 비뿌리(Viipuri)라 불리는 이곳은 13세기 이래 스웨덴 지배 하 핀란드령에 속했으나 18세기 초반 피터 대제에 의해 러시아 영토에 편입됐다. 다시 1809년 러시아 차르 치하의 핀란드 대공국 소속으로 변경된 뒤 1917년 독립 후에는 그대로 핀란드 영토가 됐는데, 한 때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핀란드와 소련의 두 차례 전쟁 끝에 다시 소련의 영토로 편입됐다. 이 때 핀란드는 영토의 약 20 퍼센트를 잃었고, 뷔보르그를 포함한 동쪽 까렐리아 지방의 주민 수십만 명이 집과 땅을 잃고 서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작년에 수강했던 핀란드어 코스의 선생님 한 분도 이 때 부모와 가족들이 까렐리아에서 땀뻬레 근처로 이주해왔다고 했다. 스웨덴으로 이민을 떠나거나 입양된 어린이들도 많아 이들의 스토리가 지금도 TV 다큐멘타리 등에서 자주 등장한다. 뷔보르그는 그렇게 러시아와 핀란드 관계사의 변천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영토로만 남아 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무거운 가방을 끌거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역사를 빠져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기차가 국경을 넘으니 풍광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숲과 호수와 도시가 이어지는 것은 비슷한데 숲은 핀란드 쪽보다 조림이 어수선했고, 황무지같은 언덕들이 자주 나타났다. 철로 주변의 아파트와 건물들은 대개 낡고 지저분한 차림새였다.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차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고, 붉은 색과 회색을 나란히 칠한 러시아 열차들도 보였다. 공간의 변화와 함께 시간의 변화도 함께 일어나는 양, 핀란드와는 왠지 확연히 다른 사회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면서 약간의 긴장이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짓 더 가자 대도시 주변의 풍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핀란드와 한 시간의 시차를 두고 러시아 시각으로 오전 1048, 기차는 삐에따리, 아니 샹뜨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고 있었다.
 
 
 


 






 



 
 

2014년 5월 30일 금요일

2016년 4월 16일, 잊지 않기 위하여


 
1.
 
안녕하세요? 쓰고 보니, 습관적으로 나온 인사말이군요. 정정합니다. 다들 어찌 사시는지요? 물론 안녕하지 못하시리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핀란드에 나와 있는 저도 통 안녕하질 못합니다세월호 참사 이후 여태 마음이 괴롭고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슬픔과 분노와 무기력이 번갈아 찾아와 사람을 괴롭혀 참 힘듭니다. 무엇보다 가슴 깊은 곳에 큰 화가 나 있는 것 같습니다그럭저럭 연구실을 나가고 인터뷰를 다니며 일상을 영위하고 있습니다만, 삶의 에너지가 점점 말라가는 느낌입니다.
 
그러다보니 침묵이 길었습니다. 블로그도 페이스북도 한 동안 쳐다보기조차 싫어졌습니다. 교묘한 말들과 용서할 수 없는 망언들이 판을 치는 한국의 언론 풍토에 한 마디도 더 얹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기막힌 사건을 대하고 보니 그냥 말이 끊어진 모양입니다. 사고 직후 몇몇 핀란드 동료들이 건네는 위로 인사에도 저 자신이 먼저 참담하고 부끄러워 금방 대화를 피하고픈 심정이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누구에게 속 시원히 말도 못하고, 그저 혼자서 저 또한 세월호 트라우마를 앓고 있었습니다.

 
 
2.
  
탐욕에 눈 먼 자들이 공동체의 키를 조종하고, 그러다 대형사고가 나도 철저하게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하고, 상상을 초월하게 무능한 정부는 진실을 감춘 채 언론을 통제하는 데는 저리도 능하고, 정치인들과 지도층이란 자들의 망언이 끊이질 않고, 그런데도 다가오는 선거에서 저들은 자기들이 다시 권력을 쥐어야겠다며 악다구니를 쓰는... 그 사이로 하나둘 떠오르는 공모와 조작과 통제의 사악한 의혹들... 이토록 철저히 망가진, 그럼에도 아직 더 망가질 구석이 많아 보이는 이 나라가 정녕 내가 속한 리퍼블릭이란 말입니까?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이미 언론과 지식인들이 많은 진단과 처방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급하게 이 사건을 규정하기보다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조사해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점에서 유가족 대책위원회의 요구와 입장을 명확히 지지합니다. 지금처럼 망가진 한국에서라면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특히, 난데없이 불거져 나온 국정원 개입 의혹이 말 그대로 한 점 의혹없이 밝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김기춘, 갈 데까지 가보자’, 금수원의 구원파가 내걸었다는 현수막의 문구도 결코 단순한 비유와 상징이 아닐 것만 같습니다.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의 폐해, 정부 민영화와 관피아현상이 야기하는 문제점, 박근혜 정부의 언론 통제와 언론사들의 순응 및 취재윤리 실종, 계속되는 안전사고와 위험사회 증후군 등도 반드시 짚고 바로잡아야할 중요한 문제들이나, 세월호 참사가 사고였는지 사건이었는지 여부는 그 모든 쟁점을 뛰어넘어 최우선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긴밀하게 연결된 사건이겠지만요.)
 
그러나 과연 진실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국회 특위 구성이 우여곡절 끝에 합의되었지만 지난 국정원 특위처럼 새누리당의 물타기작전과 증인과 조사대상기관들의 사보타지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해보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고, 달라야 합니다. 300명이 넘는 무고한 희생자들이 눈을 채 감지 못하고 있고, 선원들과 선주의 책임은 물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헌법적 책임이 엄중하게 저들을 압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세월호 사건과 희생된 우리 아이들을 결코 잊지 말아달라는 유가족 대변인의 호소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늦었지만 저 또한 스스로 다짐합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3.
  
지난 40여 일간 긴 번민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계속 붙잡고 있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 핀란드 유학길에 오른 지 어느새 2년 반이 흘러갔습니다. 갓 여섯 살이었던 선재는 지난 해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오늘 핀란드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삼십대 후반이었던 저는 40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힘들게 핀란드어를 공부하고 연구계획을 궤도에 올려놓은 뒤 이번 학기 한참 달려가고 있지만, 이 머나먼 나라 핀란드에서 지금 내가 하는 공부가 도대체 한국 사회에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갑자기 큰 회의를 느꼈습니다. 너무나 동떨어진 정치사회의 수준을 앞에 놓고, 짐짓 21세기 핀란드 의회의 개혁과 민주적 혁신을 논하는 것이 참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한 건강한 자부심, 그 최소한의 근거마저 모두 바닷물 속으로 수장된 것 같았습니다. 어느덧 기성세대의 나이가 되어버렸는데,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 책임에서 나 또한 피해갈 수 없다는 자책에 또 괴로웠습니다.
 
고민 끝에 제가 도달한 한 가지 결심은 이것입니다. 앞으로 무너진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가꾸는데 기여하겠다고. 그것이 무엇이든, 제가 헌신할 분야와 일을 찾아 10, 20년 끝까지 책임과 역량을 다하겠다고. 무엇보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사회와 교육을 바꾸는데 힘을 보태겠다고. 근원적인 성찰과 혁신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고 연대하겠다고.
 
 
4.
 
자식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이겨내며 다시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계신 유가족 분들께 큰 절을 올립니다. 거리에서, 해외에서 동료 시민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 밤마다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는 모든 시민들께도 마음을 보탭니다. 세월호 사건과 희생된 분들의 넋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2014년 4월 2일 수요일

핀란드 국가인권행동계획 세미나 참관기

[2014. 4. 2. 기자협회보 칼럼]

3월의 마지막 날, 핀란드 법무부와 의회 인권센터, 내가 유학 중인 땀뻬레(Tampere) 대학교가 공동 주최한 인권 세미나에 참석차 헬싱키에 있는 의회를 다녀왔다.

세미나에서는 2012년 4월, 현 정부가 채택한 핀란드의 첫 국가인권행동계획(2012~2013)에 관한 평가보고서가 발표됐다. 땀뻬레대 공법학과 연구팀이 작성한 평가보고서는 행동계획이 핀란드의 국가 인권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특히 정부와 시민사회가 협력해 국가인권정책을 발전시킨 점을 높이 평가했다. 보고서는 아울러 1차 행동계획에 인권정책의 우선순위가 명시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면서 정부 프로그램 및 예산과 면밀하게 연계된 행동계획의 수립을 제안했다. 나아가, 다소 산재돼 있고 자원이 불충분한 국가인권체계를 강화할 필요성도 제시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한국도 2007년부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이 수립, 시행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핀란드의 인권정책 논의가 반드시 빠르고 앞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 우리의 경우처럼 구조적 인권 침해와 차별적 실태가 만연한 현실에서 형식적 정책 체계의 수립 자체가 인권의 실현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세미나는 내게 핀란드에서 인권 정책과 담론이 발전해온 역사적 과정을 짚어볼 수 있게 했다.

사실 핀란드에서도 인권 정책의 발전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현상이다. 물론 북유럽 국가로서 핀란드에도 사민주의적 평등과 연대, 시민적 자유의 전통이 시민사회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러나 냉전 시기 핀란드는 소련의 간섭과 제약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교적 중립정책을 고수했고, 이는 국제인권 이슈에도 적용됐다. 1975년의 헬싱키 평화협약은 동서 갈등에 끼인 핀란드의 지정학적 곤란을 역으로 활용해 적극적 국제외교 전략을 구사한 결과였다.

핀란드가 국제인권 레짐에 본격 합류한 것은 1990년대다. 소련의 붕괴로 핀란드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와 유럽인권협약(ECHR)에 가입할 수 있었고, 나아가 1995년부터 EU 회원국이 됐다. 같은 해 핀란드는 헌법의 기본권 조항들을 유럽인권협약에 맞춰 전면 개정했고, 그 연장에서 2000년 헌법의 전면 개정을 단행했다. 이 시기 핀란드는 EU 의장국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국제외교활동을 전개했는데, 특히 인권, 양성평등, 국제원조, 평화중재 등의 의제를 선도하며 인권 국가로서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여전히 외무부의 외교 전략의 일부처럼 인식되던 인권 의제가 핀란드 정부의 정책 형성에 중심 이슈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이후다. 2002년부터 학교 교육에서 인권교육이 대폭 강화됐고, 2007년부터 정부 프로그램의 주목표로 인권실현의 촉진이 포함됐다. 2011년 임기를 시작한 현 정부는 국가인권행동계획을 채택하기로 의회에 보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인권은 핀란드 정책형성 회로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공간 이동했다.

이번 세미나에는 핀란드의 전 대통령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과 전 의회 옴부즈맨 리따-레나 빠우니오(Riitta-Leena Paunio), 의회 헌법위원장 요한네스 꼬스끼넨(Johannnes Koskinen)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특히, 인상적인 사람은 할로넨 대통령이었다. 비서도 없이 소박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는 단순한 축사가 아니라 풍부한 경륜에 바탕한 구체적 논평을 제공했다. 국가 권력과 시민 간의 관계가 수평적이고 가까운 북유럽 민주주의의 한 단면이다.

할로넨 대통령의 이력도 참 흥미롭다. 헬싱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할로넨은 학생운동을 거쳐 1971년 사민당에 가입했고, 1970년부터 핀란드 노총(SAK)의 변호사로 일했다. 70년대 후반 헬싱키 시의회와 핀란드 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1980~81년에는 핀란드 동성애 단체(SETA)의 대표를 역임했다. 보건복지장관(1987~90), 법무장관(1990~91), 외무장관(1995~2000)으로 활약한 뒤 2000년 핀란드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당선돼 2012년까지 연임하며 인권 외교와 성평등에 앞장섰다.

높은 대중적 지지와 국제적 명성을 누렸던 그녀는 퇴임 후에도 인권, 민주주의, 시민사회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녀의 인생 역정에서도 우리는 핀란드의 인권 정책과 문화가 발전해온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1부 세미나에서  평가보고서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있는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 대통령.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의회와 내각의 요직을 거쳐 대통령까지 지낸 그녀는 현대 핀란드의 양성평등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지금도 대중적 인기가 높다. 2002년과 2006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고(故)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회담한 일이 있다.

2부 세미나의 패널 토론. 의회 헌법위원장 요한네스 꼬스끼넨과 의회 인권센터 소장 끄리스띠나 꼬우로스(Kristiina Kouros) 등이 앉아 있다. 사회자는 내가 속한 땀뻬레대 정치학과의 전임 강사 따르야 세빠(Tarja Seppä)로 국제인권 전문가이다.

의회 인권센터 소장 끄리스띠나 꼬우로스(Kristiina Kouros)가 인권 정책과 담론의 다양한 층위와 실현 양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에는 국가인권기구가 의회 옴부즈맨 산하의 인권센터 형태로 설치돼 있다. 시민들의 진정에 대한 조사와 구제는 옴부즈맨이 직접 담당하고, 인권센터는 주로 인권 정책, 연구, 교육, 협력 기능을 맡고 있다.

<기자협회보 칼럼> 바로가기: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258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아이슬란드 재발견 (2): 금융 위기 이후 아이슬란드의 도전과 혁신

2014. 2. 26. <기자협회보> 글로벌리포트/ 북유럽
 
아이슬란드는 최근 전 지구적 기후 변화, 국제안보 환경의 변화, 인터넷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 등 현대적 도전들에 대해 적극 대응하고 있다.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14년 1/2월호에 실린 아이슬란드 대통령 올라푸르 라그나르 그림손(Olafur Ragnar Grimsson)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모습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최근 기후 변화와 북극권 개발이 큰 이슈로 떠오르면서 그동안 혹독한 기후 조건과 국제적 고립에 시달렸던 아이슬란드가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물론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까지 개발 이익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이 사안에 대해 아이슬란드는 일찌감치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북극이사회(The Arctic Council)’ 등 협력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평화·생태적 방향으로 북극권 개발이 이루어지도록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지열 등 친환경 에너지를 잘 활용해온 경험과 전문성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둘째, 아이슬란드는 군대가 없는 나라로 평화 국가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냉전 시대 미·소의 중간에 놓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NATO의 회원국이면서 미국의 군사기지로 이용됐던 아이슬란드는 많은 핵무기가 배치돼 있던 세계적 군사요충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국제안보 환경이 변화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벌였던 미 부시 정부가 2006년 아이슬란드 미군 기지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본래부터 자국 군대가 없던 아이슬란드는 ‘한 명도 무기를 든 사람이 없는’ 완전한 비무장 국가가 되었다. 올라푸르 대통령은 말한다. “전통적인 관념과는 반대로, 아무런 군사적 요소 없이도 러시아, 미국, 캐나다, 북유럽 국가들, 중국, 인도, 프랑스, 독일 등과 폭넓은 국제관계를 맺고 높은 수준의 외교활동을 통해 성공적인 국가를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셋째, 인터넷 정보 사회의 도래 속에서 아이슬란드는 정보와 언론의 자유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 위키리크스(Wikileaks)의 설립자들이 아이슬란드에 머물고 있고, 지난해 미국 정보기구 NSA의 불법적 정보 수집을 폭로했던 스노든이 애초 망명을 희망했던 곳도 아이슬란드였다. 2010년 6월, 아이슬란드 의회는 세계 각국의 진보적 법률들을 참고해 ‘아이슬란드 현대 미디어 발의(Icelandic Modern Media Initiative, IMMI)’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발의는 아이슬란드를 정부 당국들로부터 정보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고,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공개를 감행하는 저널리스트들과 출판가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보호를 제공하는 미디어 천국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최근 아이슬란드 의회에도 진출한 해적당(The Pirate Party)의 욘스도띠르(Birgitta Jonsdottir) 의원이 주도했다.

한편, 2008년 금융 위기 직후 중대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아이슬란드는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헌법 개정 논의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 큰 폭의 시민 참여와 민주적 혁신 프로세스가 가동됐다. 당시 위기를 초래한 정부와 정책결정권자들에 분노한 시민들은 의회와 중앙은행 등에 몰려가 대규모 항의 집회를 벌였다. 심각한 폭력 사태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위기 직후의 아이슬란드는 정치적 시스템과 의사결정 과정 전반에 대한 시민 불신이 아주 높은 상태였다. 총리와 중앙은행장의 사퇴, 조기총선을 통한 새 내각의 구성을 이끌어낸 시민들의 정치적 에너지는 결국 헌법의 전면 개정 요구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단지 개별 정부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아이슬란드 사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2009년 11월, 풀뿌리 시민조직들의 발의로 새 헌법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민의회가 구성됐고, 얼마 후 정부도 일반 시민 대표들로 구성된 ‘헌법위원회’를 설립했다. 수개월에 걸친 숙의, 토론, 표결, 온라인 포럼과 SNS 피드백 등 광범위한 시민 참여 과정을 통해 헌법 초안이 성안됐다. 비록 최종 단계에서 보수정당들과 엘리트 세력의 벽에 막혀 새 헌법 제정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일반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숙의를 통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고자 했던 이른바 집단지성의 민주주의(crowdsourcing for democracy) 실험은 세계시민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다.

북유럽의 변방이자 북대서양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아이슬란드. 경제위기를 딛고 다양한 안팎의 도전에 맞서 혁신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는 이 나라와 그 시민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기자협회보] 칼럼 바로가기: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33007

2014년 2월 2일 일요일

2014년 갑오해 설을 보내며

인사가 늦었습니다. 설 잘 쇠셨는지요?

저희는 조용히 떡국 한 그릇 먹고 부모님께 전화 드리며 보냈습니다. 선재도 한국서 가져온 한복을 입고 세배를 한 뒤 세뱃돈 10유로를 받았는데요. 한복 입은 모습이 어여쁘고 대견해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마지막 것은 선재 돐 때 찍은 사진인데 한복이 같은 디자인이라 '그새 많이 컸구나', 더욱 실감했다는..^^

갑오년 청마해 힘차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2014년 1월 23일 목요일

아이슬란드 재발견(1): 2008년 금융 위기의 성찰과 교훈

20141 22(), <기자협회보>에 실은 칼럼입니다. 북유럽에서도 변방의 작은 섬나라로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관해 썼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재발견!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최신호에 실린 올라푸르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 인터뷰를 읽으며 여러 측면에서 이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거든요. 무엇보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명료한 성찰이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아울러, 다음 칼럼에서는 금융 위기 이후 헌법 개정 등을 단행한 아이슬란드의 민주적 혁신에 대해 한 번 더 다루려 합니다. 칼럼은 그의 인터뷰 기사에 더해 올라푸르 대통령의 지난 수년 간의 연설문과 주요 해외 언론 보도, 관련 학술 논문 들을 추가 참조했습니다.

1월이 어느덧 하순으로 접어들었는데, 지금 핀란드에는 뒤늦게 찾아온 한파가 매섭습니다. 어제 오늘, 땀뻬레도 영하 25도의 강추위네요. 한겨울 추위에 늘 건강하시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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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재발견(1): 2008년 금융 위기의 성찰과 교훈
[글로벌 리포트 | 북유럽]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연구원

미국의 저명한 국제관계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신년호에 아이슬란드 대통령 올라푸르(Ólafur Ragnar Grímsson)의 인터뷰가 실렸다. 아이슬란드 대학의 첫 정치학 교수였던 그는 1996년 아이슬란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5번째 연임하고 있다. 정치적 지혜가 풍부한 이 학자 정치인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나는 북대서양 꼭대기에 위치한 인구 32만의 작은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중세 이래 덴마크 지배를 받은 아이슬란드는 1944년 독립한 뒤에도 냉전 시기 미·소 열강의 핵무기 경쟁과 대립의 한복판에 있었다. 북극권의 혹독한 기후 환경과 국제정치적으로 위태로운 지정학적 조건에 놓인 가난한 수산업 국가였던 아이슬란드는 1990년대 들어 산업구조의 전환을 꾀한다. 당시 유행을 따라 영미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모델을 받아들여 많은 산업을 민영화하고, 특히 은행 등 금융 산업의 탈규제와 자유화를 단행했던 것.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금융산업 팽창과 이들이 견인한 국내총생산(GDP) 성장 행진이었다. 비슷한 경로를 채택한 아일랜드와 더불어 아이슬란드는 새로운 모델 국가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해외 은행과 투자자들의 돈을 무분별하게 빌려다 쓴 사설 은행들은 국가 GDP의 10배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 지속 불가능한 경제 시스템은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뒤 직격탄을 맞고 무너진다. 2008년 가을 아이슬란드 정부는 재무자산 동결 조치와 함께 사설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이웃 북유럽 국가들, 심지어 중국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한 올라푸르 대통령의 명료한 자기반성이었다. 어떻게 은행들이 그렇게 커졌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1980년대부터 서구에 만연했던 이데올로기는 더 많이 규제를 완화하고, 더 많이 사유화하고, 더 많이 금융 시장에 자율권을 줄수록 우리 모두 더 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뿐 아니라 서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우리 모두 자본주의는 주기적 위기의 시스템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잊었지요. 우리는 얼마간, 자본주의가 더 이상 위기의 시스템이 아니라 해마다, 또 해마다 계속 성장하는 공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올라푸르에 따르면 위기 이후 아이슬란드는 대법관을 책임자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은행은 물론 재계, 정부, 대통령, 언론, 대학 등 모든 책임 주체들의 실패를 조사해 보고했다. 특별검사를 임명해 다수의 전직 은행장들을 기소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중앙은행과 금융 규제 당국의 리더십을 일신하고, 많은 법적, 규제적 변화를 단행했다. 철저한 국가적 반성과 조치를 통해 아이슬란드는 2008년 금융 위기의 교훈을 공동체의 역사 속에 아로새기고 있다.

아이슬란드는 2011년 8월 IMF 위기관리 체제를 종료했다. 2012년부터는 2% 내외의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 실업률도 약 5%로 유럽 국가들의 평균보다 낮다. 아직 많은 시민들이 경제위기의 여파로 고통받고 있고 유럽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위기의 터널을 잘 빠져나온 것으로 평가된다. 역설적으로 금융위기 직후 관광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재생에너지산업과 북극권 개발 협력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했다. 우수한 교육과 복지 시스템의 기반 위에, 풍요로운 신화와 문학적 전통에서 나오는 문화 부문의 창조력도 빼어나다.

하나 특기할 것은 금융 산업으로 흡수되던 우수한 인재들이 다른 분야로 진출하면서 IT 산업 등의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올라푸르는 말한다. “은행들이 무너지기 전까지 우리는 은행들이 수학자, 프로그래머, 컴퓨터 과학자를 고용하는 하이테크 기업이 됐다는 걸 깨닫지 못했어요. 그러나 은행들이 무너졌을 때, 이 뛰어난 인재풀이 갑작스레 시장에 나왔고, 이들 모두 6개월 내에 하이테크와 IT 회사들로 채용했습니다. 지난 4년 간 이 분야는 위기 이전 4년보다 더 발전했지요. 제가 월스트리트의 많은 친구들에게 말하는 아이슬란드 경험의 한 가지 교훈은, 당신의 국가를 21세기 경제에서 경쟁력있게 만들고 싶다면 큰 금융 산업은 근본적으로 나쁜 뉴스라는 겁니다.”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 Ólafur Ragnar Grímsson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의 수려한 풍광 속에 자리한 대통령 공관. 방문객들도 종종 대통령을 만나 인사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꼭 방문해보고 싶은 곳.


2008년 11월 금융 위기 당시 의회 의사당 앞에 모여 시위하는 아이슬란드 시민들. 30만 인구의 약  2%인 6천여명이 집결했다고 한다.
 
 
 
<Foreign Affairs> 2014 1-2월호, 올라푸르 대통령 인터뷰 기사 바로가기: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언론 자유와 공공성이 공존하는 북유럽 저널리즘

2013년 12월 4일자 기자협회보에 실은 칼럼입니다. 북유럽 언론 모델의 현황과 특징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무리했습니다. 방송의 공공성, 언론 자유, 높은 직업  전문성이 공존하는 북유럽 미디어 시스템의 특징을 '민주적 조합주의' 모델로 분류하는 전문가들의 논의를 소개하고, 이를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모델, 지중해권 주변의 단극적 다원주의 모델과 짧게 비교해보았습니다.

지면 제약으로 충분히 논의하지는 못했지만, 글을 쓰면서 2013년 현재, 우리나라의 미디어 시스템은 어떤 모델에 가까울까 계속 생각했습니다. 얼핏 지중해권의 단극적 다원주의 모델과 가까운 듯 싶지만, 요즘의 퇴행적 상황을 놓고 보면 민주화 이후 여전히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의 유산과 씨름하는 러시아와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그것에 더 흡사하지 않은가 여겨집니다. (아래 본문에서 소개한 Hallin과 Mancini의 2011년 연구를 추가 참조)

이 또한 길게 보면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리를 우리 사회가 내면화하고 학습해가는 과정일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공론장의 토대 자체가 훼손되고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가장 염려됩니다. 특히, 언론인들의 직업 전문성과 자율성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나면 훗날의 언론 개혁조차도 기약하기 어려워질까 걱정됩니다.

북유럽 언론 모델에 관한 연재는 이번 칼럼으로 마치고, 다음 글부터는 북유럽 사회의 최근 이슈들을 주로 다루어볼 생각입니다. 12월에도 늘 건강하시고, 한 해 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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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자유와 공공성 공존하는 북유럽 저널리즘
[글로벌 리포트 | 북유럽] 서현수 핀란드 땀뻬레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 연구원

북유럽 언론 모델을 찾아서 <4>

2012년 봄에 북유럽 미디어의 특징에 관한 땀뻬레대 저널리즘학과 위르끼 위르끼아이넨(Jyrki Jyrkiäinen) 교수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의 바탕에 합의적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는 시민문화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터라 큰 관심이 갔다. 위르끼 교수는 과연 북유럽 저널리즘 연구의 전문가답게 상세한 데이터를 인용해가며 핀란드와 북유럽 미디어 시스템의 특징을 생생하게 전해줬다.

그런데 북유럽 미디어 모델의 특징을 논하면서 미디어 시스템 비교 연구의 권위자인 홀린(Hallin)과 맨시니(Mancini,2004)의 개념을 원용해 ‘민주적 조합주의(Democratic Corporatism)’으로 요약하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 민주적 조합주의란 북유럽을 포함한 중부 유럽 국가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사회적 의사결정 원리로 노동시장의 임금과 고용, 나아가 이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정책의 핵심 내용을 자본, 노동, 국가가 3자 협상을 통해 결정하는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미디어 시스템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민주적 조합주의 모델이라니, 언론학도가 아닌 나로서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의문은 나중에 두 저자의 책을 직접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야 풀렸다. 무엇보다 한 사회의 미디어 시스템은 그 사회의 정치적, 역사적 컨텍스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정치 체제의 구조적, 문화적 특징이 미디어 시스템에 일정한 패턴으로 조응해 나타난다는 설명에서 중요한 이해를 얻었다.

이들의 분류에 따르면 민주적 조합주의 언론 모델은 주로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에서 나타나며 이는 영국과 미국, 캐나다 등의 자유주의 모델, 그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지중해 주변의 단극화된 다원주의 모델과 구분된다.

민주적 조합주의 언론 모델의 특징은 우선, 신문 열독률이 높고 대중 신문이 일찍 발달했다. 둘째, 역사적으로 정당 연계 신문들이 강하게 발전하고 나중에 점차 중립적 상업신문들로 전환했다. 셋째, 저널리스트들의 직업 전문성이 강하고 제도화된 자기 규제가 작동한다. 넷째, 의회주의 혹은 사회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공영방송 거버넌스가 발전했다. 그러나 방송 보도에 관한 직업적 자율성은 매우 높다. 끝으로, 미디어 규제와 언론 지원 정책 등 국가 개입의 정도가 강하지만 동시에 언론 자유는 철저히 보호된다.

영미권의 자유주의적 모델에서도 언론의 자유나 저널리스트들의 직업 전문성이 높게 나타나지만 이는 국가의 개입이 제한된 시장 지배적 모델로 최근 미디어의 상업화와 기업화, 독점 경향 등을 선도하고 있다. 영국은 BBC의 우수한 공영방송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최근 미디어 재벌 머독과 그가 소유한 언론사들이 보인 반민주적 행태들을 떠올려 봄 직하다. 반면, 단극적 다원주의 모델은 국가의 강한 개입과 약한 직업 전문성이 결합된 권위주의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 모델의 취약성은 미디어를 장악한 뒤 정치권력까지 거머쥐고 국정을 농단했던 이탈리아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 사례가 잘 보여준다.

최근 북유럽에서도 미디어의 상업화와 기업화 등 많은 변화가 관찰된다. 언론의 상업화 경향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언론 미디어 조직들도 기존의 사회정치적 모델에서 벗어나 이윤 추구형 기업 모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는 미디어 비즈니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기업들의 주식이 시장에 상장되고, 미디어 대기업들이 성장했다. 복지국가의 위기론 속에서 우파 정권들이 집권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공공부문 개혁이 추진되던 시기다. 2000년대부터는 인터넷 기반의 멀티미디어 비즈니스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유럽의 언론 모델은 위에서 살펴본 민주적 조합주의 모델의 특징을 아직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신문 열독률이 하락 추세에 있지만 여전히 매우 높은 수준이다. 방송 채널의 다원화와 상업화 경향 속에 공영방송의 시청률이 많이 하락했지만 지금도 다른 매체들에 비해 시민들의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방송의 공공성, 언론 자유, 높은 직업 전문성이 공존하는 북유럽 언론 모델의 진화가 주목된다.

[기자협회보 칼럼] 바로가기: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32409

*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위에서 소개한 Hallin과 Mancini (2004)의 책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돼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바랍니다.

<미디어 시스템 형성과 진화>, 다니엘 C. 핼린, 파올로 만치니 지음 | 김수정, 정준희, 송현주 옮김 | 한국언론재단 | 2009년 10월 30일 출간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OnelineKor.laf?mallGb=KOR&barcode=9788957112366&linkClass=17130311&ejkGb=KOR